[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플라비아 티티아나.jpg|width=100%]]}}} || || '''이름''' ||플라비아 티티아나[br](Flavia Titiana)|| ||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 || '''어머니''' ||플라비아 티티아나|| || '''남편''' ||[[페르티낙스]]|| || '''자녀''' ||[[소 페르티낙스|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헬비아||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다섯 황제의 해]]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페르티낙스]]의 황후. == 생애 == 170년 집정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와 플라비아 티티아나의 딸이다. 180년경 [[페르티낙스]]와 결혼하여 아들 [[소 페르티낙스|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와 딸 헬비아를 낳았다. 193년 12월 31일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193년 1월 1일 남편이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녀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았다. 고대 기록상에는 페르티낙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국 동방, 특히 이집트에서 그녀와 아들이 각각 아우구스타,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것을 기념하는 주화가 발행된 것을 볼 때 실제로는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두 부부는 특이한 관계를 가졌다.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이며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의 아내였던 [[코르니피키아]]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이에 대해 따지기는 커녕 어느 가수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가 애인을 두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193년 3월 28일 남편이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현장에 함께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페르티낙스와의 사이에서 딸 헬비아와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를 낳았다. 헬비아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는 아버지가 황위에 오른 후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았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뒤 직위를 잃고 외할아버지 술키피아누스의 집에 머물렀다. 술피키아누스는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차기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경매를 공개적으로 벌였을 때 입찰해 자신을 외손자의 섭정으로 자처하며 막대한 보상금을 그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입찰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술피키아누스가 제시한 것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서, 만약 자신이 아닌 술피키아누스를 지명한다면 페르티낙스의 원수를 갚겠다고 압박했고, 라이투스와 근위대는 논의 끝에 율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193년 6월 1일 로마에 입성하고 율리아누스를 처단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을 페르티낙스의 복수자라고 선언하고 페르티낙스를 신격화하면서, 아들 페르티낙스를 페르티낙스 신전의 사제로 삼았다. 그 후 소 페르티낙스는 212년경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같은 해에 [[카라칼라]]가 형제 [[게타]]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해 황제에게 "사르마티쿠스([[사르마티아]] 정복자)", "파르티쿠스([[파르티아]] 정복자)"에 이어 "게타쿠스(게타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자는 조롱이 섞인 농담을 했다가 카라칼라에게 밉보여 처형되었다. [[분류:로마 황후]][[분류:아우구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