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 '''이름''' ||플라비아 에우세비아[br](Flavia Eusebia)|| || '''출생''' ||출생년 미상 [[테살로니키]]|| || '''사망''' ||[[360년]] [[동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 '''아버지'''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 || '''형제자매'''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 플라비우스 히파티우스|| || '''남편''' ||[[콘스탄티우스 2세]]||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황후. == 생애 == [[율리아누스]]의 "에우세비아 추모사"에 따르면, 에우세비아는 마케도니아의 대도시 테살로니키 출신이며 순수한 그리스인 혈통이라고 한다. 부친은 347년 집정관을 역임한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이며, 모친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율리아누스에 따르면 "고귀한 기질을 딸에게 물려준 훌륭한 여인"이라고 한다. 당대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에우세비아의 오빠이며 359년 공동 집정관을 역임한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 플라비우스 히파티우스를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발렌스]] 황제 재위기간 동안 팔라디우스에게 반역죄로 기소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혐의를 부인해 추방과 벌금형에 그쳤다고 한다. 율리아누스 역시 두 형제를 언급하며 에우세비아의 영향을 받아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밝혔다. 리바니우스는 에우세비우스가 355년 헬레스폰트의 총독을 맡았고, 이후 안티오키아, 비티니아의 총독을 역임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히파티우스는 363년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를 역임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에우세비아가 제위 참칭자 [[마그넨티우스]]가 패망하기 전에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했다고 밝혔다. 마그넨티우스는 353년 8월에 사망했으며, 콘스탄티우스와 에우세비아의 결혼은 그해 초에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율리아누스는 그녀가 황후가 된 뒤 모든 가족과 친척에게 존경을 표했고, 성숙한 사람들을 더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여 명예를 누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황제가 자비를 베풀도록 옆에서 격려했으며, 그 덕분에 수많은 이가 악의적 기소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354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방에서 문제를 일으킨 카이사르(부황제)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 그 후 갈루스의 이복 동생 율리아누스를 밀라노로 소환했다. 율리아누스에 따르면, 그가 밀라노 궁정에 있었을 때 황제 옆에서 자신을 헐뜯는 이가 많았지만 에우세비아가 막아줬다고 한다. 그녀는 부당한 비방을 듣지 않고 남편에게 율리아누스를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그 덕분에 갈루스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율리아누스를 그리스로 잠시 보내야 한다고 주청해 허락을 얻어냈고, 그리스 철학에 흠뻑 빠졌던 율리아누스는 이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아테네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황제는 7개월 동안 나를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감시했다. 아름답고 고결한 에우세비아가 나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도 에우세비아가 변호한 덕분에 율리아누스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355년 밀라노로 다시 소환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서방의 카이사르(부황제)를 맡아 라인강 전선을 재수습하고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실 황제는 수개월간 이 결정을 내리길 주저했는데, 에우세비아가 율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일사천리로 이뤄질 수 있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추모사에서 에우세비아의 선하고 동정심 많은 성품이 자신을 살렸다며,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절대로 황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율리아누스는 이렇듯 에우세비아를 선하고 자상한 황후의 표상으로 묘사했지만, 6세기 그리스 역사가 [[조시무스]]는 그녀가 율리아누스를 도운 게 단순히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에우세비아는 율리아누스가 카이사르로 갈리아에 보내지는 것이 제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다분히 정치적 판단에 따라 율리아누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또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녀가 단지 갈리아에 더 이상 있기 싫어서 율리아누스가 그곳에서 대신 고생하라고 보낸 것이라는, 다분히 냉소적인 평을 내렸다. 현대 역사가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미 율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삼기로 마음먹었지만, 율리아누스의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누스와 이복형 갈루스를 죽여버려서 율리아누스가 자신을 불신할 테니, 에우세비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한다.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와 에우세비아 부부는 로마를 방문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때 자식이 없는 걸 한스러워하던 에우세비아가 율리아누스의 아내 [[헬레나(율리아누스의 아내)|헬레나]]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에우세비아는 헬레나를 로마로 소환시킨 뒤 친절하게 대하는 척하면서 희귀한 물약을 마시게 했는데, 이로 인해 헬레나는 유산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헬레나가 갈리아에서 아들을 출산할 때, 출산을 도와야할 산부가 에우세비아 일당의 매수를 받고 탯줄을 잘라서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다분히 악의적인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율리아누스가 에우세비아를 시종일관 찬양했던 걸 보면, 그는 이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59년, 지난날 황제를 참칭했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의 권유에 따라 항복한 뒤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던 바르바티오와 아내 아시리아가 처형되었다.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아시리아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하고 남편이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면 자신을 내쫓고 아름다운 에우세비아를 황후로 삼을까 걱정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걱정을 담은 편지를 여종을 통해 남편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여종은 편지의 사본을 들고 한밤중에 아르베티오에게 바쳤고, 아르베티오는 즉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진노하여 바르바티오와 아내 아시리아를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시리아가 정말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스톤 노우드(Haston Norwood)는 주인에게 원한을 품은 여종이 조작했거나, 아르베티오가 정교한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한편, 에우세비아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도였다고 한다. 5세기의 교회 역사가 [[소조멘]](Sozomen)은 그녀가 아리우스 일파인 비티니아 주교 에우세비우스 등에게 현혹되어 궁중의 많은 이들이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게 하였다고 기술했다. 또한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는 에우세비아가 355년 추방당한 교황 리베리오에게 금 500조각을 주려고 했지만 리베리오가 "황제에게 가져가서 군사비에 충당하시오"라며 거절했다고 기술했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 <수다(Suda)>에 따르면, 에우세비아는 공의회에 참석한 트리폴리의 주교 레온티우스에게 "당신이 만약 제게 와서 복을 빌어준다면, 당신을 위해 아주 훌륭한 교회를 짓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레온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황후이시여, 이 모든 것을 얻기 원하신다면, 그것이 주님의 영혼보다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가길 바라시거든,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제 앞에 정중히 서서, 제가 신호를 내릴 때 제 손 밑에 머리를 내밀며 복을 청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많은 것을 줄 수도 없고, 주교의 명예를 등한시하기에 그렇게 큰 일을 할 수도 없어서, 사제의 신성한 의무를 해칠 것입니다." 에우세비아는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느끼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복수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오히려 레온티오스를 칭찬하고 아내를 질책하고 안채로 보냈다고 한다. 당대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오스]]에 따르면, 에우세비아는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 아리우스파 주교이자 유명한 의사 테오필로스를 소환했다고 한다. 그는 자궁에 문제가 생겼다고 진단하고 치료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하다 결국 자궁에 생긴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암미아누스는 361년경 콘스탄티우스가 "에우세비아를 잃은 지 오래되어"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고 기술했는데, 에우세비아는 359년까지는 행적이 확인되므로 360년 즈음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로마 황후]][[분류:아우구스타]][[분류:360년 사망]][[분류:테살로니키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