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800px-Anne-Louis_Girodet-Trioson_006.jpg|width=100%]]|| ||<:>'''풀네임'''||'''샤토브리앙 자작, 프랑수아르네''' (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 ||<:> '''생몰년''' ||<:>[[1768년]] [[9월 4일]] || ||<:> '''사망일''' ||<:>[[1848년]] [[7월 4일]] (향년 79세) || ||<:> '''사상''' ||<:>[[전통적 보수주의]], [[왕당파|군주주의]] || ||<:> '''정당''' ||<:>[[법통주의|초 왕당파]] || ||<:> '''종교''' ||<:>[[가톨릭]]→ [[무종교]],,([[무신론]]),,→[[가톨릭]]|| ||<:> '''배우자''' ||<:>셀레스테 뷔송 드 라 비녜[br],,(1792년 결혼, 1847년 사별),, || [목차] [clearfix] == 개요 == 생 말로에서 1768년 9월 4일에 태어나 파리에서 1848년 7월 4일에 사망한 샤토브리앙은 불문학 작가이자 전기 작가, 프랑스 정치인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불문학에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 인생 == 11세기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가문 브르타뉴 [[https://fr.wikipedia.org/wiki/Famille_de_Ch%C3%A2teaubriant|샤토브리앙 가문]]의 둘째 아들[* 첫째인 형 장 바티스트 오귀스트(1759 ~ 1794)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콤부르(Comburg) 백작이 되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로 태어나 시종들에 의해 키워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았다. 프랑스 혁명의 초기에 아메리카로 여행을 가고 "아탈라"와 "아메리카 여행기" 등을 출판한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에 근거하여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혁명 세력이 귀족 척결을 목표로 하면서 형이 처형당하고 본인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때부터 평생 혁명에 부정적이었고, 1792년 [[프랑스 혁명]]의 귀족 척결을 피해 영국으로 피난을 갔다. 1806년부터 1807년까지 그리스, 오스만, 이집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해 그 기억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에서 회고한다. 이후 복고왕정 시절, 프랑스로 돌아와 왕정주의자로써 활동했다. 귀족 출신인데다 프랑스 혁명으로 형이 처형되어서 왕당파 성향이 강하게 생긴 것으로 보인다. 긴 외국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으며, 1822년부터 1824년까지는 [[샤를 10세]] 치세때는 외교부 장관의 직책을 맡았었다. 1815년부터 1830년까지, 즉 왕정복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상원의원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적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개방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에 대한 에세이, 기독교의 정수, 그의 저작물들은 대부분 그의 강경 왕정주의자로써의 면모를 보여준다. == 저술 활동 == ||혁명에 대한 에세이||1796년|| ||아탈라||1801년|| ||기독교의 정수|| 1802년|| ||르네||1802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1811년|| ||무덤 너머의 회상||1849년|| == 여담 == 그의 이름을 딴 [[샤토브리앙]] [[스테이크]]가 유명하다. [[분류:1768년 출생]][[분류:1848년 사망]][[분류:프랑스의 자작]][[분류:프랑스 혁명 전쟁]][[분류:프랑스의 소설가]][[분류:화폐의 인물]][[분류:일에빌렌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의 가톨릭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