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기원전 213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2> {{{#ffffff {{{+3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br]{{{-1 [[라틴어|{{{#white 라틴어}}}]]: Publius Furius Phy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3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풀리우스 필루스(조부)[br]스푸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23년 || ||<#800080> {{{#ffffff '''전임''' }}}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푸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마르쿠스, 아버지는 스푸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23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기원전 225년부터 로마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북부 이탈리아의 켈트 부족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두 사람은 인수브레스족과의 결전에서 5만에 달하는 적군을 물리쳤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9,000명의 켈트족이 죽었고 17,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원로원]]으로부터 즉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직을 사임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리미나시 부근에 달 3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집정관 선거 때 새들의 비행을 관찰한 사제들이 집정관을 잘못 뽑아서 불길한 기운이 로마를 덮쳤다고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플라미니우스는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편지를 보기를 거부했고 필루스 역시 동조했다. 로마로 귀환한 뒤 민회의 결정에 따라 개선식을 개최했으나, 원로원의 지시에 불복종한 일로 압박을 받고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예정보다 일찍 사임해야 했다. 기원전 216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그 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혹한 패배를 당하자, 원로원은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로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필루스는 시칠리아로 보내져서 함대를 규합해 카르타고 해군을 막게 했고, 또다른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카누시움에 피신한 패잔병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필루스는 시칠리아로 간 뒤 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으나 해안 근처에서 적 해군과 맞붙었다가 중상을 입고 시칠리아에 가까스로 돌아가 부상을 치료했다. 기원전 214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아들 푸리우스가 [[재무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다른 젊은 귀족들이 이탈리아에서 바다를 건너 다른 곳으로 탈출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고대 기록에는 '아들 푸리우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아들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어쨌든 푸리우스와 레굴루스는 메텔루스와 젊은 귀족들을 고발해 말을 몰수하고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췄다. 법적인 이유 없이 병역을 기피한 시민들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원로원은 도덕적 해이로 고발된 모든 이들을 시칠리아로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병으로 복무하게 하였다. 기원전 213년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호민관]]에 선임된 직후 지난날 자신을 아에라리로 강등시킨 두 감찰관을 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다른 호민관 9명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민중의 불만이 무척 강했던 터라, 두 집정관은 인구 조사를 중단해야 했다. 그는 얼마 후 사망했고, 레굴루스는 감찰관 한 명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 다른 감찰관은 무조건 물러나야 하는 관례에 따라 사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죽을 때까지 [[아우구르]]를 역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