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2><#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br]{{{-1 [[라틴어]]: Publius Sempronius Tudita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버지)[br]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형제)[br]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들)|| ||<#800080> {{{#ffffff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2><#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기원전 204년|| ||<#800080> {{{#ffffff '''전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br][[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기원전 205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800080> {{{#ffffff '''동기'''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기원전 204년 집정관)|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800080> {{{#ffffff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20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br][[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포이니케 협약을 맺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종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평민 집안인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일원이며, 아버지는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이다. 형제는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로, 기원전 210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216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칸나이 전투]]에 참가하였고, 참담한 패배로 끝난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해 진영으로 복귀했다. 당시 로마 잔여군은 2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병사들은 아군이 궤멸되고 지휘관이 없는 상황에 겁먹어 진영에 그대로 남았다. 그 중 규모가 큰 진영의 병사들은 전령을 보내 작은 진영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여 같이 도망치자고 하였다. 이때 그는 600명의 장병을 이끌고 그들과 합세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밤을 보냈다. 한편, 큰 진영에서도 여기에 남을 건지 안전한 곳으로 후퇴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고, 그는 진영에 남기로 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보병 4,000명과 기병 200명과 함께 카누시움으로 후퇴했다. 그렇게 진영에 남은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포위하자 전부 항복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간 그는 기원전 214년 최고 [[조영관]]을 역임하였고, 동료 조영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와 함께 로마 역사상 최초의 4일 경마 경기를 조직하였다. 기원전 213년 법무관을 맡아, 2개 군단을 이끌고 북 이탈리아의 아리미눔 일대에서 [[켈트]]족의 남하를 저지했다. 그는 이 임무를 기원전 211년까지 수행했고, 기원전 209년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이해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직임을 놓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경합했다. 귀족 감찰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기원전 204년 집정관)|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는 그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하려 했지만, 그가 파비우스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양보해야 했다. 한편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등 8명을 도덕적 해이 혐의[* [[칸나이 전투]] 후 해외로 망명하려 했고, 전시에 사치를 부렸다는 이유였다.]로 원로원에서 추방했으며, 칸나이 전투 때 기병대로 복무했으나 적 기병을 상대로 무기력하게 무너진 자들의 말을 몰수하고 복무 기간을 늘렸다. 기원전 205년 일리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포이니케에서 [[필리포스 5세]]를 만나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체결하였다.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브루티움 전선에서 한니발과 싸웠다. 이듬해에는 전직 집정관과 브루티움 총독의 권한으로서 한니발과 계속 대적했다. 기원전 200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찾아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략하는 필리포스 5세에게 경고한 뒤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연이어 협상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기원전 196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