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정치인]][[분류:기원전 42년 사망]]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롱구스''' }}}[br]{{{-1 [[라틴어]]: Publius Servilius Casca Long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2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마케도니아 속주 필리피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원로원]] 의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이다. == 행적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소꿉친구로 전해지며,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그러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동한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했는데, 그 이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료에서는 형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도 음모에 가담했다고 전하나, [[디오 카시우스]]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와서 황금 의자에 앉았다. 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 전에 음모자들이 카이사르 주위로 모여들었다.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버르]]가 열렬한 폼페이우스파였던 형제 푸블리우스의 추방형을 해제시켜달라고 탄원했다. 다른 사람들도 카이사르의 주위를 둘러싼 채 탄원에 합세했고, 카스카는 카이사르의 의자 뒤에 슬며시 섰다. 카이사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 킴버르가 카이사르의 토가를 잡고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것이 암살을 결행하라는 신호였다. 그 직후, 카스카가 단검을 꺼내 카이사르를 찔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스카의 검을 카이사르의 목 아래를 스쳤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뒤돌아서서 카스카의 팔을 비틀어 단검을 떨어뜨리며 외쳤다. >"카스카, 대체 무슨 짓인가?" 카스카가 동지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형제들이여, 도와주시오!" 이에 음모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카이사르를 공격했고, 카스카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카이사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결국 카이사르는 검에 수십 차례 찔러 절명했다. 기원전 44년 12월 10일, 카스카는 기원전 43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기원전 43년 6월 말, 카스카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세르빌리아]]가 주관한 회의에 참석해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와야 하는 지 여부를 논의했다. 얼마 후 [[옥타비아누스]]가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삼아 로마로 진군하자, 그는 호민관 직임에서 물러난 뒤 마케도니아로 피신해 브루투스와 합류했다. 이후 브루투스의 함대를 지휘해 리키아를 장악하는 데 공헌했다. 기원전 42년 가을 [[필리피 전투]]에 참전한 그는 첫번째 전투 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자살하자 두 명의 포로를 카시우스의 무덤 앞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필리피 전투가 완전한 패배로 끝나자, 그는 형제와 함께 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두 사람의 유해는 한 무덤에 묻혔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