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br]{{{-1 [[라틴어]]: Publius Valerius Flac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261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들)[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들)[br]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들)[br]발레리아(딸) || ||<#800080> {{{#ffffff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27년 || ||<#800080> {{{#ffffff '''전임''' }}}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br][[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발레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261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61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기원전 227년 평민 출신의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재임중에 아내와 이혼한 최초의 집정관이었다고 한다. 이 이혼은 전 집정관 스펄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의 주관하에 이뤄졌다고 한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포위공격하자([[사군툼 공방전]]), 그는 사절로서 이베리아에 가 한니발에게 적대행위 중단을 요구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는 이유로 아예 만나주지 않았고, 그는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사군툼이 먼저 적대행위를 했으며,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자신들이 승인한 적도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레리우스가 돌아온 뒤 사군툼이 함락당하고 주민들이 노예로 팔려나가자, 로마는 새 사절단을 보내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했다. 기원전 216년에서 214년 사이 노라 시에서 한니발과 대적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부관 중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고, 뒤이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함대 부관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교차 검증이 되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211년 한니발이 카푸아를 포위한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해 로마에 접근했다. 로마 시민들은 한니발의 출현에 동요했고, 원로원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등 많은 의원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군대를 불러들이자고 주장했고, 발레리우스는 카푸아 포위망을 풀지 않고도 로마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지를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이 군대를 로마 쪽으로 유인하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뿐이니, 어떤 군대도 로마로 돌아오게 하지 말고 농성만 하면 된다며 묵살했다. 결국 한니발은 며칠간 성밖에서 시위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물러났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를 위시한 발레리우스 가문은 별다른 배경이 없던 [[대 카토]]가 로마에서 정치 활동을 하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대 카토가 마르켈루스의 군단에서 대대장 격인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 그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세 아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가 있었다. 장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215년 함대 총독으로 활동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다. 차남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 대 카토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184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막내 가이우스 플라쿠스는 미성년일 때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183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다만 플라멘 디알리스는 평생 말을 탈 수 없고 로마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속주로 출장가야 하는 일반 법무관이 아니라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법무관을 맡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04년 4월 그의 딸 발레리아가 프리지아에서 위대한 여신의 화신으로 알려진 신성한 돌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딸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