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기원전 90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전쟁 사망자]]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br]{{{-1 [[라틴어]]: Publius Rutilius Ruf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90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리에티 지방 투라노 호수 || ||<#800080> {{{#ffffff '''지위''' }}} ||[[에퀴테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조부)[br]루키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90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91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br][[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br][[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동맹시 전쟁]]에서 전사했다. == 생애 == [[에퀴테스]] 가문인 루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이름이 루키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였다고 한다. 사촌으로 기원전 105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기원전 105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있었다. 기원전 93년 이전에 [[법무관]]과 총독을 잇따라 역임했고, 기원전 90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 무렵, 로마 공화국은 [[동맹시 전쟁]]에 휘말렸다. 따라서 새 집정관의 주요 임무는 로마군을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킨 동맹시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남부 전선을 맡았고, 그는 북부 전선을 맡았다. 그의 휘하에 들어간 부관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91년 법무관)|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등이었다. 루푸스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불화를 빛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신병들의 훈련을 완료한 후 공세를 개시하자"는 마리우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즉시 반란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알바 푸센스 시로 진군하던 중 기원전 90년 6월 10일 투라노 호수 부근에서 베티우스 스카토가 이끄는 마르시족의 기습을 받았다. 마르시족은 로마군이 다리를 건너 투라노 호수를 건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절반쯤 건넜을 때 공격해 모조리 수장시켰다. 루푸스는 이 날 머리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고, 많은 귀족을 비롯해 8,000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사후 지휘권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피오에게 양분되었다. 아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기원전 56년 호민관을 역임하면서 카이사르의 농지 개혁에 반대했으며 기원전 49년 법무관을 맡다가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서 그리스 총독으로서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