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포르투갈의 대외관계)] [include(틀:중국의 대외관계)] || [[파일:포르투갈 국기.svg|width=100%]] || [[파일:중국 국기.svg|width=100%]] || || [[포르투갈|{{{#ffffff '''포르투갈'''}}}]] || [[중국|{{{#ffff00 '''중국'''}}}]] || [목차] == 개요 == [[포르투갈]]과 [[중국]]의 관계. 중국과 포르투갈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을 포함한 포르투갈어권 국가들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 == 역사적 관계 == === 20세기 이전 === [[대항해시대]]부터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거쳐 [[아시아]] 지역에 식민 요새들을 하나씩 건설하며 중국까지 도착했다. 중국 남부 해안 지대에 온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 관리들을 매수하여 [[마카오]]에 무역 기지를 건설했다. 이렇게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가 되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의 문화와 가톨릭, 포르투갈어가 남게 되었다.] 전근대 중국에서는 포르투갈을 佛郞機(한국식 독음으로는 불랑기)라고 불렀다. 이는 원래 아랍어권/페르시아어권에서 유럽인 가톨릭교도들을 각각 파란지(فرنجی)/파랑기(فرنگی)라고 부른 것에서 기원한 표현이다. 원래 아랍권에서 11~12세기 십자군들을 (중세 초 유럽에 있던) [[프랑크 왕국]]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말인데, 어느덧 해당 용어가 이슬람권에서 유럽계 가톨릭 기독교인 전반을 (안 좋은 쪽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세기 본격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양]] 연안에 나타나자 동아프리카에서 남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에 이르는 무슬림 상인들은 이들을 야만스러운 광신도 이방인이라는 멸칭으로 혹은 프랑크인들의 한 갈래라고 생각해서 파란지 혹은 파랑기라고 불렀다. 해당 용어가 포르투갈인들과 중국인들을 서로 통역해주던 동남아 출신 통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 것. > [[포르투갈|불랑기(佛郞機)]]는 [[말라카]]에 가깝다. [[정덕제]] 연간(1506~1521)에 말라카의 영토를 점거하고 그 나라 왕을 쫓아냈다. [정덕] 13년(1518)에, [불랑기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책봉을 청하여서, 처음으로 그 나라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조서를 내려 방물의 가치만큼 주어 돌려보내도록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래 머물며 떠나지 않고 길가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어린 아이를 빼앗아 먹이로 삼기에 이르렀다. 얼마 안 되어 진수환관(鎭守宦官)에게 뇌물을 주고 입경을 허락받았다. 그 나라 사신은 회원역(懷遠驛)에 머물면서 더욱 노략질을 일삼고 양민을 사들이며, 집을 짓고 요새를 세워 오랫동안 거주하고자 했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4_0325_0190_0020#self|번역출처]] 그 나라 장수 페드루(別都盧)는 이미 거포와 예리한 병기로 말라카 등 여러 나라를 멋대로 탈취하여 해상을 횡행하였고, 또 그 부하 시세이루(疏世利) 등에게 5척의 배를 이끌고 가도록 하여 파서국(巴西國)을 격파했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4_0325_0190_0030#self|#]] >---- > '''[[불랑기포]]의 도입''' > [[가정제|가정]] 9년(1530) 가을에 왕굉이 아뢰기를, “지금 새(塞) 위에 돈대(墩台)와 성보(城堡)가 비록 설치되었다고는 하나 곧 외적이 침범해 오면 쉽게 유린되오며, 대체로 돈대는 요망대(暸望臺)에 불과하고 성보는 또 먼 곳을 공제(控制)할 기구가 없어서 왕왕 곤란을 받습니다. 응당 신이 바친 불랑기를 이용하시옵고, 그 작은 것은 겨우 20근(斤)에 미치지 않은 것으로 멀리 600보(步)를 공제할 수 있으니, 이를 돈대에 이용하면 됩니다. 매 돈(墩)마다 한 문을 이용하고 3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그 큰 것은 70근이 넘으며 멀리 5~6리를 공제할 수 있음으로 성보에 이를 이용하면 됩니다. 매 보(堡)마다 3문을 이용하고 10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5리에 하나의 돈대가 있고 10리에 하나의 성보가 있으니, 크고 작은 포가 서로 의지하여 멀고 가까움에 서로 대응할 수 있음으로, 앞으로 외적이 쉽게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없고, 앉아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기뻐하며, 곧 이를 따랐다. 화포(火砲)인 불랑기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장졸(將卒)들이 잘 사용하지 못하여 결국 외적을 제어할 수 없었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4_0325_0190_0040#self|#]] >---- > '''[[마카오]]의 건설''' > 해금(海禁)은 다시 완화되자, 불랑기는 이윽고 거리낌 없이 해상을 마음대로 누볐다. 그리고 향산오와 호경(壕鏡)에서 거래를 하는 자들은 집을 짓고 성(城)을 쌓기에 이르렀는데, 그 웅장함이 해변에 걸쳐 자리잡고 있어 마치 하나의 나라와 같고, 또 미련한 서리(胥吏)들은 오히려 이를 지방의 관부(官府)로 여겼다. 호경은 향산현(香山縣) 남쪽 호도문(虎跳門) 밖에 있다. 이전에 섬라·점성·조와·[[류큐|유구]]·발니 등 여러 나라들의 무역은 모두 광주에서 행했는데, [[시박사]]를 설치하여 이를 통령(統領)했다. 정덕 연간(1506~1521)에는, 고주(高州) 의 전백현(電白縣)으로 [시박사를] 옮겼다. 가정 14년(1535)에, 지휘 황경(黃慶)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게 청하여 이(시박사)를 호경으로 옮기고 매년 2만 금(金)을 부세(賦稅)로 받았는데, [이로써] 불랑기는 마침내 이곳에 혼입(混入)해 들어올 수 있었다. [호경은] 높은 처마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민(閩)과 월(粤)의 상인들은 마치 집오리처럼 이곳을 향해 재촉해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나라(불랑기)에서 오는 자는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이들을 피하고, 오로지 이들만이 웅거(雄據)하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가정] 44년(1565)에 말라카라고 거짓으로 칭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蒲都麗家)로 개칭하였다. 수신이 조정에 보고하니 예부에 내려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필시 불랑기가 남의 이름을 모칭(冒稱)한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이를 거절하였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4_0325_0190_0070#self|#]] >---- > [[명사(역사책)|명사]] 외국열전 불랑기편 포르투갈은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면서 포르투갈의 음식, [[불랑기포|대포]] 등이 중국에도 전해지게 되었고 중국의 차도 포르투갈에 전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독립을 계기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는 동안에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유지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직할 영토였고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1999년까지 이어졌다. === 20세기 === 1949년에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해서 [[중국]]이 건국된 뒤에 중국은 포르투갈령 마카오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중국은 마카오에 압력을 주고 있었지만, 영국과 달리 포르투갈은 영향력이 많이 줄게 되면서 마카오도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99년에 [[마카오]]도 중국에 반환되었다. === 21세기 === 중국은 21세기 이후,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을 포함한 포르투갈어권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 포르투갈도 마카오를 통해서 교류가 많이 있다. 마카오내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어 크레올인 마카오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마카오인]]들은 [[포르투갈인]]들과 [[중국인]]의 혼혈이다. 또한, 중국은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 유럽식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브라질과의 관계강화를 위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도 가르치는 추세이다. 또한, 포르투갈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인 [[CAPLE]]가 실시되고 있다.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경우, 마카오는 비공식 회원국으로 취급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마카오로 이주하는 포르투갈인들도 존재한다. 중국과 포르투갈은 [[아소르스 제도]]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3&aid=0007520885|중국의 과학탐사용 기지를 개방]]하기로 결정하는 등 현재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긴 미국과 대립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하지만 이에 대해서 [[미국]]은 우려를 표명했다.] 2012년부터 포르투갈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황금비자를 발급중이고 중국, 러시아, 브라질, 앙골라 출신들이 받았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7252246?sid=104|#]] 포르투갈의 산토스 실바 외무장관은 2019년 12월 5일에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화웨이 배제 요구를 거부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421&aid=0004344466|#]] 포르투갈과 싱가포르가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자 대체지로 부상하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2026150|#]] 포르투갈은 2018년에 [[일대일로]]에 참가한 이후, 중국과의 경제적인 협력을 하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7&aid=0000028797|#]] 2023년 1월 7일, 포르투갈 정부는 중국인 입국자에 대한 [[코로나19]]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687360?sid=104|#]] == 문화 교류 == 상술했다시피 중국과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통해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중국에서 가르치는 포르투갈어는 브라질과의 관계강화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지만, 마카오의 영향으로 유럽식도 가르치고 있다. == 교통 교류 ==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통해 항공노선으로 교류하고 있다. == 관련 문서 == * [[포르투갈/외교]] * [[중국/외교]] * [[포르투갈/역사]] * [[중국/역사]] * [[포르투갈령 마카오]] * [[포르투갈/경제]] * [[중국/경제]] * [[포르투갈/문화]] * [[중국/문화]] * [[포르투갈인]] / [[중국인]] * [[포르투갈어]] / [[중국어]]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포르투갈/외교, version=60, paragraph=3.1)] [[분류:포르투갈-중국 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