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제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br]{{{-1 [[라틴어]]: Paullus Aemilius Lepid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78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br][[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아버지)[br][[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삼촌)[br]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첫번쨰 아내)[br]클라우디아 마르켈라(두번째 아내)[br]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장남)[br][[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1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차남)[br]아이밀리아(딸)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4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br][[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멤미우스(기원전 34년 집정관)|가이우스 멤미우스]]→[[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옥타비아누스]][br][[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기원전 33년 집정관)|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명문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78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내전에 참여했고, 술라가 [[독재관]]을 역임하던 시기인 기원전 7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포풀라레스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 아풀레이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는 등 은연중에 민중파의 입장에 공감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레피두스가 아풀레이아와 이혼했다고 기록했지만, 언제 그랬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77년 술라 정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에트루리아를 진압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해 로마로 진격했다가, [[폼페이우스]]에게 패한 뒤 사르디니아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동생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민중파의 거두로 떠오르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잡았으며, 카이사르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50년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동생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약한 동생과는 달리 로마에 남아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간의 대립으로 들끓을 때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동생이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자 안토니우스와 더불어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찬성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부터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혔지만 동생이 눈감아준 덕분에 이탈리아를 무사히 탈출하여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인 [[밀레투스]]로 망명한 뒤 로마에 복귀하길 거부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기원전 50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가 삼두로부터 숙청 대상에 올랐을 때 동쪽으로 탈출한 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에 가담해 [[크레타]]에서 해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필리피 전투]]에서 삼두파가 승리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내전]]에 참가했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한 뒤 칼라브리아 해안으로 도주한 옥타비아누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중도에 길을 잃어 옥타비아누스와 헤어졌고, 삼두파의 숙청 때 아버지를 잃었던 그의 노예가 해안가를 정처없이 걸어가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죽이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호해서 실패했다. 이 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4년 7월 1일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뒤를 이어 [[가이우스 멤미우스(기원전 34년 집정관)|가이우스 멤미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집정관 자격으로 아버지에 의해 건설이 시작된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봉헌했다. 이후 고위 사제단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고, 총독의 권한으로 모종의 지역을 통치했다. 기원전 22년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임기는 재앙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파울루스가 능력 부족이었다면 플란쿠스는 소심해서 감찰관의 직무인 규탄과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의견이 자주 충돌했기에 임기가 대실패로 끝나고 명예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아프리카 원정에서 활약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폼포니아누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아내이자 [[대 율리아]]의 어머니이기도 한 [[스크리보니아]]의 딸인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와 결혼해 두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과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1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딸 아이밀리아를 낳았다. 장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서기 6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서기 1년 집정관을 맡았고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 혐의로 처형당했다. 딸 아이밀리아는 서기 13년 집정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결혼했다.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가 사망한 뒤에는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서기 15년 [[재무관]]을 맡아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 속주에서 활동한 아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