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include(틀: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2> '''{{{+1 토머스 페인}}}[br]Thomas Pain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590px-Thomas_Paine.jpg|width=100%]]}}} || || '''본명''' ||토마스 페인[br]Thomas Paine|| ||<|2> '''출생''' ||1737년 2월 9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데포드|| ||<|2> '''사망''' ||1809년 6월 8일 (향년 72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직업''' ||철학자, 작가|| || '''관심분야''' ||[[정치]], [[윤리학]], [[종교]]|| || '''배우자''' ||메리 램버트 ^^(1759년 ~ ?, 사별)^^[* 출산 도중 사망. 임신하고 있었던 아이도 같이 세상을 떠났다.][br]엘리자베스 올리브 ^^(1771년 ~ 1774년, 사별)^^|| || '''사상''' ||[[자유주의]] ([[급진주의]]), [[공화주의]] [[세속주의]]적 [[인본주의]]|| || '''종교''' ||[[이신론]]|| || '''서명''' ||[[파일:Thomas_Paine_Signature.sv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 출신의 [[미국]]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역사적)|급진주의]] 사상가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였다. == 생애와 유산 == 그는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비롯해 영국의 식민통치에 불만이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그래도 당시까지만 해도 혁명(독립)보단 "대표 없이 관세 없다"로 대표되듯 영국 지배하의 개혁을 지지하는 여론이 좀 더 강했는데, 1776년 페인이 미국이 독립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과 미국이 독립해야 하는 [[사상]], [[이념]], [[도덕]]적 정당성을 저술한 《상식(Common Sense)》을 발간하고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미국 인민들의 독립 여론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어떻게 인간의 한 종류가 나머지 인간들 위에 높이 자리잡고 앉아 마치 새로운 종족인 듯 특별한 대우를 받는게 당연시되는 것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됐는지... 왕이 다스리는 국가는 악마가 우상숭배를 증진시키기 위해 내세운 발명품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위대하게 높이는 행위는 자연의 [[평등권]]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영국은 군주에게 잘못이 없다는 거짓말을 했다. 정부가 국민을 억압할 때는 왕의 가까운 고문들이 비난받았다. 그동안 왕은 비난으로부터 벗어난 정당함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왕은 폭력으로 지배해왔다.", '''"지금까지 왕관들을 썼던 모든 악당들보다는 정직한 보통 사람 한 명이 사회에 더 가치가 있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군주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1776년 미국에서 50쪽 분량의 팸플릿 형태로 발표된 토마스 페인의 '상식'은 그가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독립운동 방향을 영국 군주제의 통치권 아래에서 왕에게 무엇을 바라는 방향이 아니라 영국과 완전 결별하고, 독립된 [[헌법]]을 만들어 별도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 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이후 프랑스 [[의원(정치인)|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양대혁명인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모두 영향을 끼친 국제적인 혁명가인 셈. 1791년에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1790년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비난하며 이를 반박하는 《인간의 권리》 줄여서 [[인권]]이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1792년에는 인권 2부도 발간한다. 페인은 ‘인권 1부’에서 자연권과 시민권을 구분하고 있는데, 자연권은 국민의 주권, 개인적 자유권, 선거권, 언론의 자유, 혁명권이고, 시민권은 자연권에 근거한 것으로서 자유, 평등, 안전, 재산, 사회적 보호, 압제에 대한 항거를 그 내용으로 한다. 페인의 '인권 2부'에서는 대중교육, 빈민구제, 노인연금, 실업구제, 누진적 소득세 징수, 재산권의 사회적 책임, 빈민층 보호 등 오늘날의 사회적 입법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허나 페인은 인권 2부 출판 후 당시 [[영국]]정부에 의해 [[판금]] 조치를 받게 되고, 본인도 반란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후 1802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이미 그가 1793년 감옥에서 [[이신론]]에 빠져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어서 당시 종교 분위기가 강화되던 미국 교단에서는 독립의 아버지 대신 적대적인 무신론자 취급을 받게 된다.[* 사실 페인 외에도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가 당시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신론]], [[무신론]]에 빠졌다는 해석은 지금도 많지만, 특히 이 부분이 두드러져서 당대 목사들에게 어그로를 끈 인물 2명이 바로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이 둘은 당시 이름도 토머스로 같다 보니 '양 톰(두 톰)'이라고 싸잡아 까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대통령까지 되며 정치적으로 성공해 안티들이 함부로 건들진 못한 제퍼슨과 달리, 사인이었던 페인은 온갖 가짜뉴스와 음모론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결국 1809년 뉴욕에서 사망하는데 당시 뉴욕 시티즌이 그에게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라는 패드립성 부고 기사를 싣고, 그의 장례식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쓸쓸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조국인 [[영국]] 그리고 그의 책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에서의 평가는 점차 바뀌게 되었고, 지금은 그를 영국의 [[볼테르]]로 칭송하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도 인정되어 미국 뉴욕대학 캠퍼스에 그의 반신상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상식의 저자스럽게 당시에는 [[상식]]이 아니었던 것을 상식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성공한 셈이다. [[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8230|<내가 읽은 책> 토마스 페인의 ‘상식’과 ‘인권’]], [[https://www.voakorea.com/a/episode_thomaspaine-208431/6024802.html|[인물 아메리카] 미국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사상가, 토마스 페인]]. [각주] [[분류:프랑스의 사회운동가]][[분류:미국의 사회운동가]][[분류:영국계 미국인]][[분류:프랑스 남성 작가]][[분류:미국 남성 작가]][[분류:1737년 출생]][[분류:1809년 사망]][[분류:노퍽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