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테오도로스 브라나스[br](영어: Theodore Branas, 그리스어: Θεόδωρος Βρανᾶς)|| ||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 '''직위''' ||[[알란인|알란]] 용병대 지휘관,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 '''종교''' ||[[가톨릭]]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의 [[귀족]]. [[알렉시오스 3세]] 휘하에서 [[제4차 십자군 원정|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략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끝내 함락된 뒤에는 [[라틴 제국]]에 귀순했다. == 생애 ==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와 [[마누일 1세]]의 조카 안나 콤니니의 아들이다.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살해된 뒤 과부가 된 22세의 [[프랑스의 아녜스]]를 보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했지만, 그녀가 [[아우구스타]] 직위를 잃을 수 있었기에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후 [[이사키오스 2세]]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했지만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고, 1195년 [[알렉시오스 3세]]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 집권 후 각지의 반란 토벌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고, [[1203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알란 용병대를 이끌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가 도피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략된 뒤, 그는 [[라틴 제국]] 초대 황제 [[보두앵 1세(라틴 제국)|보두앵 1세]]의 권유에 따라 아녜스와 결혼하여 훗날 투시의 나르조와 결혼한 딸을 하나 두었다. 1206년 [[앙리(라틴 제국)|앙리]] 황제로부터 카이사르(부황제) 칭호를 받았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 정권과 협력한 로마인들의 지도자였다고 기술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자, 차라리 라틴인들과 협력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그는 지역 그리스 군인들과 40명의 라틴 기사로 구성된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수비대를 이끌었고, 1206년 8월 20일 디디모티콘을 포위한 불가리아군과 맞섰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1207년]] 봄 [[칼로얀]]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하자, 그는 구원군이 올 때까지 항전하여 성을 사수했다. 이후 아드리아노폴리스, 디디모티콘, 아프로스의 영주로 선임되었고, [[1219년]] 사위 투시의 나르조와 함께 [[피에르(라틴 제국)|피에르]] 황제와 [[욜랑드 드 에노|욜랑드]] 황후 사망 후 [[로베르 1세(라틴 제국)|로베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올 때까지 잠시 통치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군인]][[분류:라틴 제국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