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95_clemente_V.png|height=125]] || || 제194대 [[베네딕토 11세|복자 베네딕토 11세]] || → ||<#806600> '''{{{#FFF 제195대 클레멘스 5세}}}''' || → || 제196대 [[요한 22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95대 교황[br]{{{+1 클레멘스 5세}}}[br]Clemens V}}}'''}}}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클레멘스5세.jpg|width=100%]]}}}|| || '''교황명''' ||클레멘스 5세 (Clemens V) || || '''본명''' ||레몽 베르트랑 드 고트[br](Raymond Bertrand de Got)[* 일부 문서에서는 Goth 혹은 Guoth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 ||<|2> '''출생''' ||[[1264년]] ||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width=25]] [[프랑스 왕국]] [[누벨아키텐|가스코뉴]] 빌랑드로 || ||<|2> '''사망''' ||[[1314년]] [[4월 20일]] (향년 49~50세) ||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width=25]] [[프랑스 왕국]] [[옥시타니|랑그도크]] 로크모르 || || '''재위기간''' ||[[1305년]] [[6월 5일]] ~ [[1314년]] [[4월 20일]]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Clemens PP. V[br][[프랑스어]]: Pape Clément V[br][[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br][[영어]]: Pope Clement V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95대 [[교황]]. [[프랑스 왕국]]의 왕 [[필리프 4세]]에 휘둘려 교황권의 쇠퇴를 결정적으로 가져온 인물이자 [[아비뇽 유수]]를 말미암아 [[아비뇽]] 교황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 [[성전 기사단]] 해체 ==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국]]의 왕 [[필리프 4세]]의 강한 압력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1307년 프랑스 왕국의 [[성전 기사단]] 소속 수백 명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사채]], [[사기죄|사기]], [[이단]], [[직권남용]] 등의 죄를 붙여 고발했다. 목적은 [[교황청]]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은 물론 교황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교황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싶던 필리프 4세가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성전 기사단원들을 교회 법정에 세우고자 했으나, 필리프 4세는 교황의 의견을 은근스레 무시하고 왕국 자체적으로 성전 기사단원들을 재판함으로써 교황은 점차 유럽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어만 갔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막무가내 태도에 대단히 불쾌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교황에게 성전 기사단에 관해서 논의하는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요구했고, 국왕의 강압에 못 이긴 교황은 1311년 [[빈(오스트리아)|빈]] [[공의회]]를 열었다. 빈 공의회를 통해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단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해체하기로 결정되었다. 성전 기사단의 프랑스 왕국 지부의 재산은 [[구호기사단]]에게 양도되었으나 필리프 4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무단 사용하였다. == [[아비뇽 유수]] == [[프랑스 왕국]]은 [[교황청]]이 주재하고 있는 [[로마]]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 화재로 전소되는 일 등 치안이 불안정하고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교황청은 안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교황청 이전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1309년 3월,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지역으로 이전했다. 4년 뒤, 교황은 교황청을 당시 [[아를 왕국]]의 도시였던 [[아비뇽]]으로 이전하는 사건, 일명 '''[[아비뇽 유수]]'''가 발생했고,[* '아비뇽 유수'라는 명칭은 당시 유명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페트라르카]]가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표현한 것에 비롯되었다.] 이후 약 70여년 동안 지속되는 아비뇽 교황 시대가 열렸다. 이는 강력했던 교황권이 쇠퇴의 길목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고, 동시에 세속 권력이 교회 권력을 장악한 역사적인 격동을 의미했다. 아비뇽 유수는 [[교황령]]에 있어서도 달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교황이 자리를 비우게 된 교황령은 세 명의 추기경이 교황 대리로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나 당시 로마는 유명 귀족 가문들인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이 세력 다툼을 벌여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분류:1264년 출생]][[분류:1314년 사망]][[분류:지롱드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인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