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그리스의 역사)] ||<-4><:>{{{#FFFFFF '''{{{+2 크레타 자치국 }}}'''[br]Cretan State [br]Κρητική Πολιτεία }}} || ||<-2><:> [[파일:크레타 자치국 국기.svg|width=150]] ||<-2><:> [[파일:크레타 자치국 국장.svg|width=150]] || ||<-2><:> {{{#FFFFFF '''국기'''}}} ||<-2><:> {{{#FFFFFF '''국장'''}}} || ||<-4> {{{#FFFFFF '''지도'''}}} || ||<-4> [[파일:크레타 자치국 지도2.png|width=90%]] || ||<-4><:> {{{#FFFFFF '''1898년 12월 9일'''}}} {{{#FFFFFF '''~'''}}} {{{#FFFFFF '''1913년 12월 1일'''}}} || ||<-3><:> {{{#FFFFFF '''국가'''}}}||크레타의 찬가 || ||<-3><:> {{{#FFFFFF '''수도'''}}}||[[이라클리온]] || ||<-3><:> {{{#FFFFFF '''언어'''}}}||[[그리스어]], [[튀르키예어]] || ||<-3><:> {{{#FFFFFF '''종교'''}}}||[[그리스 교회]], [[수니파]], [[이슬람교]] || ||<-3><:> {{{#FFFFFF '''정치체제'''}}}||[[군주제]] || ||<-3><:> {{{#FFFFFF '''통화'''}}}||[[드라크마|크레타 드라크마]] || ||<-3> {{{#FFFFFF '''역사'''}}} ||<-3>• 건국: 1898년 12월 9일 • 멸망: 1913년 12월 1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강들의 개입으로 건국된 국가. == [[크리스천]] 연합파의 반란 == [[크레타]] 섬은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대다수는 [[크리스천]]([[정교회]] 신자)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섬의 [[크리스천]]들은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을 추구하며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대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유럽 국가들의 압력으로 [[오스만 제국]] 정부로부터 약간의 양보를 얻어냈다. 그 후 1878년 할레파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자치정부]]가 되었고, 이후 1889년 오스만 제국이 이 조약을 파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연합파의 [[크레타]] 점령과 혼란 == 하지만 조약의 붕괴는 [[크레타]] 섬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결국 1895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으며 1896년부터 1897년까지 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등 6개 강대국은 1897년 2월 [[크레타]] 섬에 군함을 파견했고, 그들의 해군들은 크레타 섬에서의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해 개입하는 임무를 맡은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 한편 [[그리스 왕국]]에서는 [[민족주의]]적 [[비밀결사]]들과 열렬한 여론이 [[그리스 왕국]] 정부가 이 섬에 군대를 파견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국제 전대는 신속하게 작전을 중단했지만, [[크레타]]에 [[그리스군]]이 주둔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크레타]]의 대부분은 [[크레타]] 반란군과 [[그리스군]]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그리스군은 [[테살리아]]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이 전쟁은 열강들의 개입으로 끝났고, 이들은 [[그리스군]]을 [[크레타]]에서 철수시키고 [[오스만 제국군]]은 진격을 중단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할레파 조약의 조항을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 국제 전대의 통치와 건국 == 1897년 2월, 열강들은 국제 함대를 구성하는 6개 강대국의 [[제독]]들로 구성된 제독 회의를 통해 [[크레타]] 섬을 일시적으로 통치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크레타]] 반란군에 대한 해상 포격, [[해군]]과 [[해병대]]를 해안에 배치하여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크레타와 [[그리스 왕국]]의 주요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국제 전대는 1897년 3월 말까지 [[크레타]]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종결시켰다. 하지만 1897년 3월 말과 4월에 [[독일 제국]]은 [[크레타]]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후 제독 공의회는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통치를 종식시키지 않고 반란을 종식시키는 협상된 해결책에 초점을 맞췄고, 크레타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자치정부]]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 후 [[독일 제국]]은 1897년 11월 [[크레타]]에서 철수했고 이후 1898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침공을 해왔지만 나머지 4개국은 계획을 계속했다. 1898년 9월 6일 [[크레타]] 섬에서 [[무슬림]] 폭도들이 수백 명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고, 영국 부영사의 가족과 14명의 선원들을 살해했다. 이후 동년 11월 국제 전대와 점령군은 크레타 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냈다. 크레타 자치국은 [[그리스 왕국]]이 제공한 국제 주둔지였으며,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요르요스가 최초의 고등 판무관으로 취임하면서 건국되었다. 그리스 국립은행은 [[크레타]] 은행을 설립했는데, 크레타 은행은 40년 동안 [[지폐]] 발행을 독점했다. 그리고 크레타 정부는 또한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왕국]]의 [[카라비니에리]]를 모델로 한 준군사 조직인 크레타 헌병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크레타 헌병대는 조지 왕자가 도착하기 전에 4개의 점령 세력이 만든 4개의 소규모 헌병대를 통합했다. ==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 선포와 멸망 == 1907년 2월 헌법이 공포되었지만, 1908년 [[오스만 제국]]의 혼란과 자이미스가 휴가를 떠난 시기를 이용하여 [[크레타]]의 대표들은 [[그리스 왕국]]과의 일방적인 [[연합]]을 선언했다. 그리고 [[크레타]] 주의 국기는 [[그리스 왕국]]의 국기로 대체되었고, 모든 공무원들은 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으며, 그리스 왕국 헌법과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1910년 [[그리스 왕국]]의 총리로 선출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포함한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912년 5월, [[크레타]] 자치국의 대리인들은 [[아테네]]로 가서 [[그리스 의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저지당했다.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 왕국]]은 마침내 동맹을 인정하고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를 [[크레타]] 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열강은 1913년 2월 14일 수다 요새에서 깃발을 내리는 행위로 암묵적으로 기정사실을 인정했고, 1913년 5월 런던 조약으로 [[메흐메트 5세]]는 [[크레타]] 섬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포기했다. 12월 1일, 하니아의 피르카 요새에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1세]]가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 왕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크레타]] 섬의 [[무슬림]] 소수민족은 처음에는 섬에 남아있었으나, 1923년 [[터키]]와 [[그리스 왕국]] 간의 [[로잔 조약]]에서 합의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일반 인구 교환]]에 따라 [[터키]]로 이주되었다. [[분류:그리스의 역사]][[분류:20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