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br]{{{-1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5년 12월 31일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증조부)[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조부)[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버지)[br]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장남)[br]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차남)[br]파비아 파울리나(삼녀) || ||<#800080> {{{#ffffff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45년 || ||<#800080> {{{#ffffff '''전임''' }}} || [[율리우스 카이사르]]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기원전 45년 집정관)|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br]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기원전 45년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는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또한 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21년 집정관을 맡아 알로브로기스 족과 아르베르니 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으며, 이후 [[개선식]]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투스를 포함한 수많은 포로를 내세워 민중의 찬사를 받았고, 자신의 동상을 [[포로 로마노]] 인근 아치 위에 세웠다.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91년 감찰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로부터 방탕한 생활을 이유로 유산 상속을 금지당했다는 것 외엔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59년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와 함께 마케도니아 총독을 역임하면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를 고소했다. [[키케로]]가 히브리다를 변호했지만, 배심원단은 유죄 판결을 내렸고 히브리다는 전 재산을 잃고 망명해야 했다. 키케로는 훗날 히브리다를 변호할 때 썼던 연설문을 출판했는데, 망명지에서 이걸 읽은 히브리다는 "그가 실제로 이렇게 했다면 여기서 물고기나 잡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았다. 그는 조부 알로브로기쿠스의 동상과 개선문을 복원했지만,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식량난을 초래했고,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특별 권한을 줘서 식량을 수송하게 했다.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기 때문인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기에 [[옵티마테스]]파에게 곱게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정치 경력을 쌓는 귀족의 의무인 법무관 직을 맡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그 대가로 기원전 48년 이전에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46년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지휘하는 옵티마테스파 군대와 대적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가 심했기 때문에 오쿨보에 진을 치고 카이사르가 올 때까지 버텼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에 일조했고, 문다 마을을 점령하고 약탈을 벌인 뒤 우사오 마을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등 적군 수뇌부가 궤멸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발레아레스 제도로 피신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45년 9월, 카이사르는 단독 집정관에서 물러나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을 맡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기원전 45년 10월 1일에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45년 12월 31일 돌연 사망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별다른 질병을 앓은 적도 없었고 쇠약해진 징후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세간에 큰 논란을 야기했다고 한다. 사후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기원전 45년 집정관)|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 12월 31일 단 하루만 집정관을 맡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기원전 44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장남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1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차남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10년 집정관을 맡았다. 딸 파비아 파울리나는 기원전 31년 집정관을 맡았고 안토니우스의 심복이었다가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전향한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결혼했다. [[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기원전 45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