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br]{{{-1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Allobrogi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아버지)[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들)[br][[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21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2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br][[가이우스 판니우스(기원전 122년 집정관)|가이우스 판니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br][[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아이밀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가 파비우스 가문으로 입양된 뒤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들이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젊었을 때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전 135년 [[재무관]] 선거에 출마했을 때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자신의 조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34~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 들어가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했다.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했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장례식에서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쓴 연설문을 직접 읽었다. 기원전 124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23년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했다. 이때 그는 곡물을 가득 실은 선박을 로마로 보냈는데,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파비우스가 로마에만 식량을 보냄으로써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의 권세를 증오하고 견딜 수 없게 했다고 질책하고, 이 곡물을 모조리 팔아서 챙긴 돈을 지방에 분배하도록 명령했다. 기원전 121년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알로브로게스 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2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돕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향했다. 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이 알로브로게스족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적하자, 그는 아헤노바르부스와 연합해 기원전 121년 8월 8일 이세르 강 인근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갈리아 남부 일대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 개편되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비우스는 알로브로게스족에 대한 개선식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아르베르니족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개선식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투스를 포함한 수많은 포로를 내세워 민중의 찬사를 받았고, 자신의 동상을 [[포로 로마노]] 인근 아치 위에 세웠다.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베스타]] 신전 인근 신성한 길에 개선문을 세웠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관하여>에서 시인 루키우스 아키우스가 그를 "품위 없이 말하지 않고 라틴어 그리스어, 문학 모두에 지식이 매우 풍부했다"고 평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기원전 91년 법무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파비우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명성을 먹칠하는 것을 규탄하고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손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4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