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learfix] == 개요 == 기원전 49년,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군이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휘하의 [[옵티마테스]] 함대에 의해 쿠릭타 섬에 포위된 뒤 항복한 전투. == 상세 ==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돌아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라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묵살하고 로마로 진격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피해 브룬디시움으로 후퇴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 [[브룬디시움 공방전]]을 벌였지만, 폼페이우스가 발칸 반도로 이동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40척의 함대를 맡겨 이탈리아 해안선을 지키게 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일리리쿰 총독으로 임명되어 새로 모집된 24군단과 신편 28군단의 절반을 맡아 일리리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대규모 옵티마테스 함대를 이끌고 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가 이를 저지했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쿠릭타 섬으로 피신했고, 옵티마테스 함대는 이 섬을 포위 공격했다. 돌라벨라는 쿠릭타 섬에 고립된 아군을 구하고자 진격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이후 옥타비우스와 리보는 쿠리타 주변에 해상 봉쇄를 실시해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부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가 뗏목을 이용해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 했지만, 적이 킬리키아식 그물을 걸어뒀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조석]]을 이용하여 뗏목 중 2척이 그물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중 한 척은 근처의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이 배에는 오피테르기움에서 온 1,000명의 갈리아 보조군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종일 저항했으나, 결국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항복을 거부하고 서로를 찔러 죽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가 쿠릭타 섬에 고립된 아군을 구하고자 수송선을 보냈지만 적 함대에 가로막혀 돌아가야 했고,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모든 희망을 버리고 15개 코호트들과 함께 항복했다. 항복한 장병 중 많은 이가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다가 처참하게 패하고 죽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함께 이 패배를 카이사르파의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거론했다. [[분류:카이사르의 내전]][[분류:공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