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 {{{+2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남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br]'''Kurt [[남작|{{{#fff Freiherr}}}]] von Hammerstein-Equord'''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440px-Kurt_von_Hammerstein-Equord.jpg|width=100%]]}}}|||| ||<#666> '''{{{#FFF 이름}}}''' ||''' Kurt Gebhard Adolf Philipp [[남작|Freiherr]] von Hammerstein-Equord ''' [br] 쿠르트 게프하르트 아돌프 필리프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남작 || ||<|2><#666> '''{{{#FFF 출생}}}''' ||[[1878년]] [[9월 26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힌리히스하겐[* 現 [[https://de.wikipedia.org/wiki/Woldegk|볼데크]]] || ||<|2><#666> '''{{{#FFF 사망}}}''' ||[[1943년]] [[4월 24일]] (향년 64세) || ||[[나치 독일]] [[베를린]] || ||<#666> '''{{{#FFF 복무}}}''' ||[[독일 제국군]] (1898년 ~ 1918년)[br][[독일 국군]] (1918년 ~ 1934년)[br][[독일 국방군]] (1939년)|| ||<#666> '''{{{#FFF 최종 계급}}}''' ||상급대장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철십자 훈장 1/2급|| ||<#666> '''{{{#FFF 장인}}}''' ||발터 폰 뤼트비츠||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제국]], [[나치 독일]]의 군인. == 생애 == 1878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에서 태어나 [[1차 세계 대전]]에서 서부전선에서 종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육군 참모총장까지 올랐다.[* 당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참모부 보유가 금지되어 있어서 '군사국(Truppenamt)'이란 이름으로 사실상의 참모부를 보유했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군사국 국장'.] 하머슈타인은 집권하기 전부터 나치를 혐오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통해 1932년에 히틀러가 총리에 지명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복을 벗었다. [[장검의 밤]] 때 자신의 친우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살해당하고 친나치 성향의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가 장례식 참석을 금지했을 때도 무시하고 참석했다. [[2차 대전]] 발발 후에는 현역으로 복귀했으나, [[폴란드 침공]] 때는 후방인 서부 전선의 분견군A 사령관,[* 이때 [[루드비히 베크]]에게 히틀러가 여기 시찰을 오면 암살하겠다고 했다는데 히틀러가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이후에는 [[실레시아]]에 배치되었다가 1939년 9월 21일 나치 이념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역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반나치 활동을 계속 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도 연루되었지만 1943년 [[베를린]]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자신의 관에 [[스와스티카]]가 덮이는 것을 원치 않아서 가족묘에 매장되었으며, 히틀러는 어쨌든 고위급 군인의 죽음이라 화환과 애도 메세지를 보냈는데 하머슈타인의 가족들은 이를 '''분실'''해서 장례식에 두지 않을 정도로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나치를 거부했다. == 평가 == > 이런 범죄 행위를 보고도 묵인한 군대에 속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 > - 유언 [[독일 국방군]] 장성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아돌프 히틀러]]와 사이가 안 좋았어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적당한 강압과]] [[빌헬름 리터 폰 레프|회유를 통해]] [[발터 폰 브라우히치|나치와 타협]]한 반면 하머슈타인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부터 죽을때까지 나치에 반대했다. 당대 독일 군부 인사들이 나치는 반대했더라도 [[루드비히 베크|왕당파이거나]], [[헤닝 폰 트레슈코프|전쟁범죄에 연루되었거나]], [[아르투어 네베|인종주의에 공감했거나]] 해서 '히틀러에 반대했다'는 것만 빼고는 높이 평가하기 어려운 반면 하머슈타인은 나치 집권 후에는 한직에만 있어서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 없었고, 유대인 학살에도 공감하지 않고 최대한 탈출을 도왔다. 왕당파 성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인인 발터 폰 뤼트비츠가 주도한 [[카프 폭동]]에 동참 요청을 거부했고, 노동 조합 간부들과도 친하게 지내서 "붉은 장군"이란 별명을 얻기까지 한 것을 보면 최소한 국가에 충성하고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 가족 관계 == 마리 루이즈(장녀, 1908~1999), 마리 테레사(차녀, 1909~2000), 헬가(삼녀, 1913~2005), 콘라트(장남, 1918~2007), 루드비히(차남, 1919~1996), 프란츠(삼남, 1921~2011), 힐더(막내딸, 1923~2012)까지 4녀 3남을 두었는데 다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 마리 루이즈와 헬가는 아예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당대 공산당에 대한 인식에 비추어보면 하머슈타인이 활동을 용인한게 정말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딸들의 의사를 존중했거나, 똑같이 나치에 대항하기 때문이기 때문에 용인한 것으로 보인다. * 마리 테레사는 부친이 유출한 유대인 학살 계획들을 근거로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도피시키는 활동을 했다. * 콘라트와 루드비히는 참전하기도 했지만 부친이 사망할 즈음에 현역 부적합 판정을 받고 후방 근무를 했고, 1944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실패 후 도피해서 살아남았다. * 프란츠와 힐더는 히틀러 암살이 실패한 이후 연좌되어서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에 갇혔고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위의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았음에도 다 엄청나게 장수했다. == 어록 == > 나는 내 장교들을 영리하고, 게으르고, 근면하고, 멍청한 네 부류로 나눈다. 대부분은 이 중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리하고 근면한 이들은 고급 참모 역할에 적합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놈들은 전 세계 군대의 90%를 차지하는데, 이런 놈들은 정해진 일이나 시키면 된다. 영리하고 게으른 녀석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최고 지휘관으로 좋다. 하지만 멍청하고 근면한 놈들은 위험하므로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흔히 [[한스 폰 젝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의 4가지 유형|멍청/영리 근면/게으름 조직 인사론의 4도식]]을 기록상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다. 실제로는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가 아예 없던 말을 지어낸거 같진 않고, 원래부터 특유의 [[임무형 지휘체계]] 시스템 때문에 그 높은 판단력을 보장할 수 있는 양질의 장교단 인적 자원 육성에 큰 관심을 가지던 독일 군부에서 종종 하던 관용어로 보인다. [[분류:1878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의 남작]][[분류: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