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urosawa_giants.jpg|width=100%]]}}} || ||<-2> '''{{{#ccac00 요미우리 자이언츠 No.4}}}''' || ||<-2> {{{#ffffff '''{{{+2 쿠로사와 토시오}}} [br]黒沢 俊夫'''}}} || || '''{{{#ffffff 출생}}}''' ||<(> [[1914년]] [[6월 10일]] || || '''{{{#ffffff 사망}}}''' ||<(> [[1947년]] [[6월 23일]] (향년 33세)|| || '''{{{#ffffff 출신지}}}''' ||<(> [[일본]] [[오사카부]] || || '''{{{#ffffff 국적}}}''' ||<(> [[파일:일본 국기.svg|width=25]] [[일본]] || || '''{{{#ffffff 포지션}}}''' ||<(> [[외야수]] || || '''{{{#ffffff 투타}}}''' ||<(> [[좌투좌타]] || || '''{{{#ffffff 소속팀}}}''' ||<(> 나고야 긴코군(1936~1940) [br] 다이요군/니시테츠군(1941, 1943) [br]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1944, 1946~1947) || [목차] == 개요 == [[오사카부]]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 선수 시절 == 오사카부립 야오 중학교 시절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 봄, 여름대회를 합쳐 5회 출장했고, [[간사이대학]]에 진학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에이스이던 '''니시무라 유키오'''[* 西村幸生(1910~1945). 대학 졸업 후 1937년 [[오사카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제법 활약을 보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인해 불과 3시즌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일본군]]에 소집되어 1945년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했다. 평소 [[술고래|술을 굉장히 좋아하여]] '''주선(酒仙) 투수'''라는 별명으로도 통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주선(酒仙)의 일본어 발음이 주전(主戰)과 같은 '''슈센(しゅせん)'''이라는 점. 즉 주선 투수와 주전 투수를 오가는 [[말장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와 더불어 학교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933년 칸사이대의 [[하와이]] 원정 멤버에 포함되기도 했다. [[파일:kurosawa_nagoya.jpg]] 나고야 긴코군 시절의 쿠로사와 1936년 프로야구 발족과 함께 창단한 '''나고야 긴코군'''에 대학을 중퇴하고 입단, 바로 팀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인 1937년 춘계, 추계리그 모두 0.295, 0.279의 타율과 총 3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맹 활약을 보였다. 1940년 시즌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쿠로사와는 1년 만인 1941년 긴코군과 츠바사군의 합병 구단 '''다이요군'''으로 복귀했고, 또다시 징병되어 1년 간 군복무를 마친 후 1943년 구단 운영권이 [[서일본 철도|니시닛폰 철도]]로 넘어간 '''니시테츠군'''[* 이 팀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와 모기업만 같을 뿐 서로 관련은 없는 별개의 구단이다.]으로 돌아온 쿠로사와는 그 해 0.190의 낮은 타율 이었지만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리그 3위인 32타점을 기록했다. 니시테츠군이 자금난으로 인하여 1944년 해체된 후 쿠로사와는 '''곤도 사다오''' 등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교진군]]으로 이적하여 팀의 1번 타자로 활약하며 타율 0.348(리그 2위), 17타점(5위)으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주요 선수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전력이 많이 떨어진 교진군의 주축 타자로 힘을 보탰다. 그 해 5월 20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긴키닛폰군]] 경기 때 '''1경기 2[[홈스틸]]'''이란 진기록을 남겼으며 통산 홈스틸 10개로 역대 2위[* 1위는 [[요나미네 카나메]]의 11개.]를 마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쿠로사와는 1946년 [[교진군]]에 복귀하여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돌아오기 전 까지 팀의 4번 타자를 맡았고, 카와카미가 돌아오자 5번을 치며 타율 0.308, 60타점으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이 해 11월 열린 '''프로야구 동서대항전'''에 동군 선수로 출장한 쿠로사와는 2점을 뒤지던 5차전 연장 12회말 무사 만루 찬스에서 주자를 모두 쓸어담는 끝내기 3루타를 날리며 [[클러치 히터]] 다운 모습을 뽐냈다. == 사망 == 1947년 6월, [[장티푸스]]에 감염된 쿠로사와는 몸이 안 좋은 상황임에도 [[미하라 오사무]] 감독에게 이를 숨기고 출장을 강행하다 결국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지만 회생하지 못하면서 6월 23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33세. 쿠로사와의 장례식은 교진군 사상 최초의 구단장으로 치루어졌고, [[치바 시게루(야구선수)|치바 시게루]] 등 교진군 주력 선수들의 제안에 따라 쿠로사와의 생전 등번호이던 '''4번'''은 [[사와무라 에이지]]의 14번과 함께 [[영구 결번/스포츠|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쿠로사와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교진군의 유니폼을 입혀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쿠로사와의 유해는 교진군 유니폼을 입고 관 속에 들어갔다.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일본프로야구 영구 결번 선수]][[분류:오사카부 출신 인물]][[분류:1914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외야수]][[분류:좌투좌타]][[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장티푸스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