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NPB)]] [[파일:external/www.zakzak.co.jp/bbl1107041137000-p2.jpg]] || 성명 || 콘도 카즈히코(近藤和彦) || || 생몰 || [[1936년]] [[3월 2일]] ~ [[2002년]] [[6월 10일]] || || 출생지 || [[일본]] [[오사카부]] [[타카츠키시]] || || 투타 || [[좌투좌타]] ||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 학력 || 헤이안 고교 - [[메이지대학]] || || 프로 데뷔 || 1958년 || || 소속팀 || [[타이요 훼일즈]](1958~1972)[br][[킨테츠 버팔로즈]](1973) || || 지도자 경력 || [[타이요 훼일즈]] 2군 타격 코치(1976~1977)[br][[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작전 겸 타격 코치(1982)[br][[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작전종합 코치(1983~1984)[br][[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타격코치(1985~1986)[br][[닛폰햄 파이터즈]] 타격 코치(1987~1988)[br][[닛폰햄 파이터즈]] 2군 감독(1991~1992)[br][[닛폰햄 파이터즈]] 수석 코치(1993~1994) || ||<-5><#0F8F2D><:>[[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30]]]] '''{{{#ffffff 1961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60년[br]나카 토시오[br]([[주니치 드래곤즈]])[br]50도루 || → || '''콘도 카즈히코'''[br]'''([[타이요 훼일즈]])'''[br]'''35도루''' || → || 1962년[br]코우노 아키테루[br]([[주니치 드래곤즈]])[br]26도루 || [목차] == 개요 ==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명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란 특이한 타격폼으로 이름을 날렸다. == 프로입단 이전 ==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 고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인 1953년 춘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코시엔]]에 출장했지만, 이때는 백업급 선수로써 고작 대타로 1타석 서는 데 그쳤다. 고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고, 야구부 선배이자 훗날 [[타이요 훼일즈]]에서 함께 동료로 뛰게 되는 아키야마 노보루와 함께 1955년 춘계리그 우승,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열린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 대표로 출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통산 성적은 '''타율 .259(255타수 66안타), 0홈런 23타점, 베스트나인 3회([[1루수]] 1회, [[외야수]] 2회) 선출.'''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했다. == 프로 생활 == 갓 입단한 콘도는 동계훈련 때 빠른 공에 적응 못하며 시행착오를 겪던 중, [[검도]]에서 힌트를 얻어 오른손으로는 배트의 그립을 잡고 왼손으로 배트 중간을 잡은 채 배트 헤드를 위로 눕혔다가 공이 오면 배트를 세워 스윙하는 특유의 타격폼을 창안해 낸다. 이것이 위에 언급한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다.[* 일설에는 고질병이던 팔꿈치 통증을 완화시키려고 만들어낸 타법이란 얘기도 있다.] [[파일:tenbing.jpg]] 그러니까 이런 해괴한 자세로 안타를 잘도 뽑아냈다는 말이다. 아무튼 데뷔 첫해부터 [[외야수]], [[1루수]]를 맡고 시즌 중반엔 [[클린업 트리오|3번 타자]]에 정착하며 주전 자리를 꿰차고 '''타율 .270(468타수 113안타), 13홈런 37타점, 10도루'''이란 준수한 성적을 거둔 콘도는 1969년까지 매년 세 자릿수 안타를 꼬박꼬박 찍으며 원조 '''안타 제조기''' 라는 별명을 얻었다.[* 물론 그 별명은 얼마 후 [[장훈(야구선수)|장훈]]이 이어받게 된다.] 4년차인 1960년엔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은 타율 2위(.316)를 기록하며 타이요의 첫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400(15타수 6안타)를 찍는 등 맹활약하며 시즌 때와 마찬가지로 타이요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여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1961년 7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카와사키 구장]] 개최)에선 사상 20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고, 1963년 [[올스타전]] 1차전에선 [[이나오 카즈히사]]를 상대로 끝내기 2점 홈런을 쳐서 MVP를 수상했다. 또한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느린 발에도 불구하고 주루센스가 뛰어나 1961년 시즌 [[도루]]왕(35개) 타이틀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3할 타율을 6번 기록했지만 수위타자와는 인연 없이 타격 2위만 4번 했다. 1970년 시즌 이후 타격 쇠퇴와 더불어 주전 [[3루수]] 마츠바라 마코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타이요 훼일즈]]에서 뛰며 구단 사상 최다 기록인 '''2081안타 330홈런 1172타점(통산성적은 2095안타 331홈런 1180타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안타 1위를 2번한 것 빼곤(그마저도 1994년부터 타이틀 시상) 단 1번도 타이틀 수상 경험이 없었을 뿐더러 [[센트럴리그]] 우승과도 경험이 없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198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은퇴하게 된다.]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출장기회가 급감한 곤도는 1973년 [[외야수]] 미야하라 히데아키와의 1대 1 트레이드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16년 간의 프로 생활 동안 '''1736안타, 109홈런, 483타점, 159도루, 타율 0.285'''의 통산 성적을 남겼고, '''도루왕 1회, 베스트 나인 1회, 올스타전 출장 9회'''를 기록했다. 은퇴 후 [[타이요 훼일즈]]와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지도자를 역임했고 1997년에는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 후엔 [[후지TV]], [[닛폰 방송]],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 발족에 공헌하기도 했으나, [[2002년]] [[6월 10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하여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 기타 == * [[나가시마 시게오]]는 콘도에 대해 '''"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중 1명"'''으로 고평가한 바 있다. * [[1966년]] [[5월 10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쳤지만, 홈런을 치기 전 [[타임]]이 되어 있었기에 끝내기 홈런이 무효가 되어, 다시 타격을 했을 땐 [[투수]] 땅볼로 끝난 적이 있다.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타카츠키시 출신 인물]][[분류:메이지대학 출신]][[분류:1936년 출생]][[분류:200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