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베트남의 역사)] [include(틀:프랑스의 식민지)] ||<-3><:> {{{#fff {{{+1 '''코친차이나 식민공화국'''}}}[br]'''Colonie de Cochinchine[br]Xứ thuộc địa Nam Kỳ (處屬地南圻)[* 1862 ~ 1946]'''[br]{{{+1 '''코친차이나 공화국'''}}}[br]'''République autonome de Cochinchine'''[br]'''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共和自治南圻)'''[* 1946 ~ 1948][br]{{{+1 '''남베트남 임시정부(월남 임시정부)'''}}}[br]'''Gouvernement provisoire du Sud Viêt Nam'''[br]'''Lâm thời chánh phủ Nam Phần Việt Nam (臨時政府南方越南)[* 1948 ~ 1949]'''}}} || ||<-3><:> [[프랑스]]의 [[식민지]]|| ||<-2><:>[[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75%]]||<:>[[파일:Coat_of_arms_of_French_Cochinchina_-_Album_Artistique_de_la_France_&_de_ses_Colonies_(1900).svg.png|width=50%]]|| ||<-3><:>[[파일:French_Indochina_1900-1945-fr.svg.png|width=300px]] || ||<-3><:>아래 노란색 부분 || ||<-3><:> '''{{{#fff 1862 ~ 1949}}}''' || ||<-2><:> '''성립 이전''' ||<:> '''통합 이후''' || ||<-2> '''[[응우옌 왕조|{{{#DC143C 대남국}}}]]''' ||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DA251D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 || ||<:> '''위치''' ||<-2> [[베트남]] 남부 || ||<:> '''수도''' ||<-2> [[사이공]] || ||<:> '''통화''' ||<-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터 || ||<:> '''정치체제''' ||<-2> [[프랑스]]의 [[식민지]] || ||<:> '''국가원수''' ||<-2>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령 안남]]과 [[통킹]]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국가원수인 것에 반해,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된 프랑스의 직할식민지로서 프랑스 대통령이 [[국가원수]]였다.] || ||<:> '''정부수반''' ||<-2> 코친차이나 [[총독]][* 南圻總督. [[쯔꾸옥응으|Thống đốc Nam Kỳ]]. [[프랑스어|Gouverneur-général de la Cochinchine]] ] || ||<:> '''언어''' ||<-2> [[프랑스어]], [[베트남어]]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에 의하여 점령된 베트남의 남부지역 땅을 말한다. 형식적으로는 [[응우옌 왕조]]의 영역이자 프랑스의 보호국인 [[프랑스령 안남]]과 [[통킹]]과 다르게 이곳은 프랑스의 직할통치를 받던 [[식민지]]였다. == 역사 == [[1858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를 공격하였다. 결국 [[1862년]]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가 굴복하여 훗날 코친차이나라 불리게 되는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3개 성을 양도했고, 프랑스는 이곳을 직할령으로 지배한다.[* 이후 합병한 [[통킹]]과 [[안남]]은 [[보호령]]으로 통치한다.] [[1867년]]에는 베트남을 협박해 안장, 하띠엔, 빈롱을 추가로 양도받았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초기에는 [[군정]]으로 통치하다가 [[1880년]]부터 민정으로 전환한다. [[1887년]]에는 [[캄보디아]], [[안남]], [[통킹]]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이루었다. 이곳은 사실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중심지로, 프랑스는 이곳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산업을 육성시켰다. [[1902년]]까지 인도차이나 연방 수도가 [[사이공]]이었으며, 쌀과 고무, 설탕, 담배같은 농업을 육성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과 친불 베트남인 대지주들이 생겨났고, 소작농 [[베트남인]]들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노동을 하였다. [[1916년]]에 대규모 반불 봉기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1930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농민들의 집단 [[파업]]이 일어났으나 프랑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1936년]]에는 식민지 개혁이 시행되었다. [[정치범]]을 석방하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 제국]]이 군대를 주둔시켰고, [[1945년]]부터는 일본 [[괴뢰정부]]인 [[베트남 제국]]의 일부를 이뤘으나 일본이 패망하며 베트남 제국도 망해버린다. || [[파일:Flag_of_Republic_of_Cochinchina_(variant).svg.png|width=150]] || ||코친차이나 공화국 국기|| 그러다가 공산주의 세력 [[베트민]]이 통킹과 안남 북부를 장악하자 [[영국]]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재점령했고,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류(Georges Thierry d'Argenlieu) [[프랑스 해군]] 제독의 주도로 코친차이나 의회는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다. 초대 총리는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이었다. [[프랑스령 안남|안남]]과 [[통킹]]이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로 통합된 이후에도 코친차이나 공화국은 남베트남 임시정부로 이름을 바꾸며 존속하다가, 1949년 베트남 임시중앙정부에 통합되었다. 남베트남 성립 직전의 코친차이나의 메콩강 삼각지에서는 불교계 신흥종교인 호아하오교(Đạo Hòa Hảo)[* 후인푸소(Huỳnh Phú Sổ, 1919-1947)가 창시했다. 복잡한 불교 의례를 대폭 간소화하였고, 가족애를 중시하고 진홍색 나무판을 법신불의 상징으로 경배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후인푸소는 베트민에게 살해당했는데, 베트민은 호아하오교 신자들이 묘를 만들지 못하도록 후인푸소의 시체를 [[오체분시]]하여 호아하오교 신자들의 분노를 샀다.]가 큰 위세를 떨쳤다. 호아하오교는 본래 외세를 배격하는 성향이었으나, 베트민에게 심하게 공격당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자치군벌화하여 베트민과 싸웠다. [[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은 후 이들은 남베트남 국방군으로 흡수되었고, 이를 거부한 잔존세력은 토벌되었다. [[사이공 함락]] 이후, 호아하오교는 까오다이교와 함께 반동 종교 세력으로 분류되어 한동안 탄압받으며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분류:베트남의 역사]][[분류:프랑스령 인도차이나]][[분류:프랑스-베트남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