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미우리 자이언츠/간략(코칭스태프))] ---- ||
'''{{{#fa5a1e 코마다 노리히로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2>
[br][[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로고.svg |width=70]][[파일: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엠블럼(1993~2011).svg |width=70]] [br]'''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9년 일본시리즈|{{{#fd5a1e 1989}}}]]''' || '''[[1998년 일본시리즈|{{{#ffffff 1998}}}]]''' || ---- ||
[[센트럴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30]]]] [br] '''[[베스트나인|{{{#ffffff 1998 NPB 센트럴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 ---- ||
[[센트럴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30]]]] [br] '''[[골든글러브(일본프로야구)#2.3|{{{#ffffff 1989, 1991, 1993~1999 NPB 센트럴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f8f2d, #3fb1e5)" [[일본프로야구|[[파일:NPB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89년 일본 시리즈 MVP}}}'''}}} || || [[이시게 히로미치]][br]([[세이부 라이온즈]]) || → || '''코마다 노리히로[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br]([[세이부 라이온즈]]) || }}}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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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타자]]는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1975년에 도입되었다는 걸 기억하자.], 이해 86시합 출장에 타석수는 고작 199타석뿐이었음에도 52안타 '''12홈런''' 47타점 타율 .286을 기록하여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며 요미우리의 크나큰 기대를 받는 신예로서 주목을 받는다. [[파일:코마다노리히로외다리타법.jpg]] 배팅 케이지 뒤에서 지켜보는 배번 1번은 외다리타법의 1인자 [[오 사다하루]] 당시 감독이다. 하지만 이후 3년 동안은 [[외다리 타법]]으로 타격폼을 바꿨다가 성적부진으로 다시 타격폼을 바꾸는 등 [[타격폼]] 변경에 의한 부진 등으로 인해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다. 그러다가 1986년 시즌 후반기 당시 2군 코치였던 [[마츠바라 마코토]][* 그 [[타이요 훼일즈]]의 [[무관의 제왕]] 맞다.]의 지도를 받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홈런 위주의 어퍼스윙 타격 스타일을 버리고 레벨스윙의 타격 스타일을 확립한다. 그후 1987년부터 출장기회를 크게 늘려가기 시작한 코마다는 시즌 후반 [[마츠모토 타다시]][* 1982, 83년 2년 연속 [[센트럴리그]] 도루왕. 1983년 세운 76도루는 센트럴리그 통산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이다.]에게서 주전 [[외야수]] 자리를 빼앗았고[* 결국 마츠모토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1988년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꾼뒤 드디어 선수생활 처음으로 [[규정타석]] 만족에 성공[* 이후 1999년까지 13년 연속으로 규정타석 만족에 성공한다.], 타율도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주전에 완전히 정착하여 이후 요미우리의 주전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이듬해인 1989년, 당시 주전 [[3루수]]였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 결국 나카하타도 부상으로 인한 성적 부진 때문에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주전 1루수였던 [[오카자키 카오루]]가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면서 코마다가 대신 [[1루수]]로 전향하게 되었고, 이해 "공포의 7번 타자"로 불리며 125안타 11홈런 56타점 10도루[* 코마다가 선수생활 동안 유일하게 기록한 두 자릿수 도루다.] 타율 .303을 기록. 이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일본프로야구)|골든글러브]](1루수)를 획득하며 팀의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 이후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522, 1홈런 5타점'''에 우승이 결정된 7차전에서 선발투수 가토에게 선제 홈런을 날려 [[킨테츠 버팔로즈]]를 [[리버스 스윕]]패의 나락에 몰아넣으며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해부터 주로 [[1루수]]로 뛰게 된다. [[파일:1989년 당시.jpg]] 1990년엔 7번 타자로 뛰며 22홈런 83타점으로 팀 최다 타점을 기록했고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 출장(팬투표로 선출)을 달성하기도 하며 2년 연속으로 1루수 [[골든글러브(일본프로야구)|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1991년엔 3번 타자로 출장하며 팀 최고타율 겸 본인 생애 최고타율인 .314를 기록, 3년 연속으로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주전선수로써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다. 이해 8월 22일 [[도쿄 돔]]에서 열린 VS [[주니치 드래곤즈]] 戰에서 프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내기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1992년엔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인해 주전 [[3루수]]였던 [[하라 타츠노리]]가 [[1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다시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타율 .307에 개인 최다의 27홈런을 기록하고 [[올스타전]] MVP까지 수상했으나 타점이 고작 64점에 [[득점권타율]] .231의 전형적인 찬스 상황에 약한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어[* 이 해 득점권 여포짓을 한 타자는 나카오 다카요시와 맞트레이드되어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오쿠보 히로모토]]. 오쿠보는 이해 코마다의 입단동기인 4번타자 하라를 받쳐주는 요미우리의 5번타자로 활약, 꼴찌로 추락하던 요미우리를 우승권으로 끌어올렸다.] 골든글러브 4년 연속 수상에도 실패한다. 다음해인 1993년에는 [[하라 타츠노리]]가 다시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며 [[1루수]]로 재전향. 그러나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타격부진에 빠지면서 이 해 1990년부터 시작된 연속 풀이닝 시합출장[*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9년 7월 21일부터 2010년 4월 17일까지 1,492경기, 13,686이닝]기록과 1989년부터 시작된 연속시합출장 기록[* 일본프로야구 기록은 [[기누가사 사치오]] 2,215경기이며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칼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로 갱신했다.]이 각각 307시합과 450시합에서 멈춰버렸고 '''타율 .247. 7홈런 39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성적이 더 심하게 추락하고 말았다.[* 입단동기인 하라도 에이징 커브가 오면서 2년 후 은퇴한다.] 다만 이 해 골든글러브를 2년만에 수상하기도 한다.[* 이후 요코하마로 이적한 94~99년까지 포함해 7년 연속으로 수상한다.] 그 후 코마다는 새롭게 도입된 [[FA 제도]] 행사를 선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간토]] 지역의 구단으로 이적하길 원했던 코마다와 前 요미우리 수석코치 출신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콘도 아키히토]] 감독이 코마다의 영입을 원했던 것등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았기 때문에 요코하마로 이적했던 것이었다. 은사였던 [[후지타 모토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고. 정작 코마다는 [[간사이]] 출신인건 함정.][* 이해 요코하마 구단은 훼일즈 시절이던 1980년대의 주전이었던 [[타카기 유타카]], [[야시키 카나메]], [[다이몬 카즈히코]], [[야마자키 켄이치]], [[이치카와 카즈마사]], [[마츠모토 유타카]] 등 무려 6명의 베테랑 선수들을 젊은 선수 중심의 팀 재편을 명목삼아 방출시켰는데, 이 방출의 실상은 코마다를 영입하기 위한 FA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FA를 선언해 요미우리를 나간 이유는 [[나카하타 키요시]] 등의 구단 수뇌진들과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강타자이자 코마다와 똑같은 주전 [[1루수]]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한 것 때문에 주전 자리와 출장기회를 뺏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로 추측된다.[* 1996년 요미우리가 1993년과 마찬가지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이자 주전 [[1루수]]였던 [[기요하라 카즈히로]]를 FA로 영입하자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이에 반발해 코마다와 마찬가지로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해 요미우리를 퇴단.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하게 된다. 다만 코마다와는 달리 오치아이는 이미 황혼기인 40대였고 무엇보다 노쇠화로 기량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오래 뛰지 못하고 2년 후 은퇴한다.] 아무튼 요미우리에서 [[고쿠보 히로키]], [[오오무라 사부로]] 등 트레이드로 온 이적생이 前 소속구단에 FA로 돌아간 사례, 마찬가지로 이적생인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이 주전에서 벗어나 백업으로 머물다가 구단에 사실상의 전력 외 통보를 받아 FA를 선언해 퇴단한 사례가 있지만, 교진 순혈선수가 요미우리에서 FA로 일본프로야구의 타 구단에 이적한 것은 현재까지 코마다가 유일하다.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파일:external/www.jiji.com/nar089-jlp00541982.jpg]] 요코하마로 이적한 첫해인 1994년, 개막 초엔 3번타자로 뛰며 호성적을 남겼지만, 갈수로 점점 성적이 저하하면서 중반부터는 6번 타자로 주로 출전하게 된다. 성적은 타율 .284, 13홈런 68타점이었으며 리그 최다 2루타(33개)를 기록했지만 반면 리그 최다 병살타(29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요코하마에 이적한 후론 주로 2루타를 양산하는 2루타머신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그 후 1995년엔 타율은 .289로 살짝 올랐으나 6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파워가 하락하여 홈런 갯수가 심하게 낮아지게 된다. 이후 발을 크게 올리는 타격폼을 때때로 시험해 보게 된다. 1996년엔 5,6월쯤까지 좋은 기세를 보이며 이적후 첫 3할 타율이 기대되었으나, 후반기 들어 실속을 거듭하며 결국 타율 3할에 딱 1리 모자라는 타율 .299에 그쳤다. 대신 후반기에 배트를 눕히는 방식으로 타격폼을 개조하며 10홈런을 기록. 다시 두 자릿수 홈런을 날렸고 이해 8월 22일 [[도쿄 돔]]에서 열린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합에서 [[만루 홈런]]을 날리면서 [[센트럴리그]] 전 구단에게 [[만루 홈런]]을 빼앗는 대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근데 타점은 63점으로 더 떨어졌다. 1997년엔 주로 5번 타자로 출장. 전년도보다 더 오른 타율 .308, 12홈런 86타점을 기록하며 5년만에 3할 타율을 달성. 타점도 개인최다 기록을 찍었다. 그 후 이듬해인 1998년, 새로 취임한 [[곤도 히로시]] 감독 휘하에서 머신건 타선[* 당시 요코하마 타선은 [[이시이 타쿠로]] - [[하루 토시오]]의 [[호타준족]] [[리드오프]], [[스즈키 타카노리]] - [[로버트 로즈]] - 코마다 노리히로의 강력한 타력을 지닌 [[중심타선]], 그 뒤를 받치는 [[사에키 타카히로]], [[나카네 히토시]], [[타니시게 모토노부]], [[신도 타츠야]] 등의 튼실한 타격력을 갖춘 [[하위타선]] 등의 좋은 타자들이 포진해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3할 초중반대의 고타율을 노릴 수 있는 컨택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한 시즌 10여개 언저리의 홈런을 날릴 수 있는 적당한 장타력과 단타, 2루타 머신으로써의 연타력까지 지닌 교타자들이었으며, 이 타자들이 단타, 2루타를 머신건(기관총)처럼 연타로 날리며 상대팀을 떡실신시키는 것이 당시 요코하마의 공격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1997~2000년까지 센트럴리그 수위타자(2000년 수위타자는 위의 중심멤버보다는 뒷 세대인 재일교포 스위치 히터 [[긴조 다쓰히코]]였다.)가 모두 요코하마에서 배출된 것은 당시 요코하마 타선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던 일화. 자세한 설명은 [[http://kkjzato.egloos.com/1946653|참고]]]의 주축 5번 타자 겸 주장으로 활약하며 타격성적은 시즌 막판 부진에 빠지면서 타율 .281, 9홈런 81타점으로 전년보다 하락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만루의 사나이답게 만루 상황 등 찬스 때 좋은 활약을 펼치며 81타점을 기록, 팀의 38년 만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에 대공헌했고 본인도 이해 생애 유일의 [[베스트나인]]을 수상하게 된다. 일본시리즈에선 4차전까지 시즌 막판의 부진이 계속되며 고작 2안타로 부진했지만 5차전에서 만루 적시타를 포함한 4안타 5타점으로 대활약하며 부진을 벗는데 성공, 6차전에서도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지는 2타점 적시 2루타를 날리며 이 해 시즌과 마찬가지로 팀의 38년 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대공헌하며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시즌오프 때 야구교실에서 부상을 당하여 수술을 받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99년에도 마찬가지로 타율 .291, 9홈런 71타점과 25시합 연속안타, 12년 연속 100안타의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 하지만 이 해 팀 타선이 '''타율 .294'''란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하는 바람에 .294보다 더 낮은 타율을 기록한 코마다가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1993년 시즌 말부터 이어진 739시합 연속 출장이 끊기며[* 요코하마 시절만 포함하면 딱 1시합을 뺀 738시합인데, 이 기록은 구단사상 최다 연속출장기록이다.] 2번째로 연속출장 기록이 끊기는 일을 맛보기도 한다. 그후 2000년, 대망의 2000안타까지 불과 73안타만 남은 상황이 되었으나, 수뇌진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성적부진에 빠진다.[* 결국 이해 규정타석 만족에 실패하며 연속기록이 끊긴다. 마찬가지로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실패하여 연속기록이 끊긴다. 이 와중에 대타 기용 문제 등으로 격분해 경기도중 팀을 이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때는 2000안타 달성을 그만두고 바로 은퇴를 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으나, 은사였던 [[오 사다하루]]의 수필 편지를 받고 개심하여 선수생활을 지속, 결국 9월 6일 대망의 2000안타를 달성하며 [[명구회]]에 들어간다. 그 후 구단 측에서 은퇴를 권고했으나 거부하여, 결국 시즌 말 [[전력외통보]]를 받는다. 전력외통보를 받은 후 현역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나, 그를 부르는 구단은 없었고, 결국 이듬해인 2001년 1월 은퇴를 선언하며[* 하지만 현역생활 지속에 대한 욕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은퇴선언 기자회견에서도 "1주일 후에 (선수로) 뛰어주지 않겠냐고 (어느 구단에서라도) 부르면 그렇게 하겠다" 라고 말하며 그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부르는 구단은 여전히 없었다.]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코마다의 통산 성적은 아래와 같다. || 출장시합 || 2063 || || 타석 - 타수 || 7598 - 6941 || || 득점 || 810 || || 안타 || 2006 || || 2루타 || 357(통산 34위) || || 3루타 || 27 || || 홈런 || 195 || || 타점 || 953 || || 도루 - 도루사 || 35 - 35(통산성공률 50%) || || 희생타 || 28 || || 희생플라이 || 47 || || 사사구 - 삼진 || 582 - 1113 || || 병살타 || 229(통산 11위[* 오오시마 야스노리, 코다마 하루토시와 공동]) || || 타율 || .289 || || 출루율 || .342 || || 장타율 || .433 || || 만루 상황 성적 || 타율 .332, 13홈런(통산 5위), 200타점 || || 베스트나인 수상 || 1회[* 1998년(1루수 부문)] || || 골든글러브 수상 || 10회[* 1989~1991, 1993~1999년(전부 1루수 부문)] || || 일본시리즈 타이틀 || 1989년 MVP, 1998년 우수선수상 || == 은퇴 이후 == 은퇴 이후엔 야구 해설가, 평론가 등을 맡다가 2005년 신생구단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타격코치로 취임했으나 개막 후 얼마 안가 팀 타격 부진의 책임을 지고 2군 타격코치로 강등되었고, 시즌 종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또다시 야구평론가로 일하다가[* 라쿠텐 퇴단 직후인 200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프링캠프에서 임시로 '''[[이승엽]]'''의 개인 인스트럭터를 맡기도 했다. 당시 맡았던 보직은 1군 수비 코치.] 2009년 제2의 친정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팀 타율이 리그 최하위인 .239를 기록하는 등 팀 타선 지표가 전년도보다 더 추락하며 팀의 2년 연속 최하위를 막지 못한 채 한 해만에 다시 코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요코하마를 퇴단한 후 다시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일하면서 [[치바 롯데 마린즈]], [[토키와대학]]의 임시코치를 맡기도 하다가 2016년부터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소속의 [[독립리그]] 야구팀 [[고치 파이팅 독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9년까지 감독직을 역임했다. 코치 퇴단 직후 2021년까지 야구 해설과 유튜버를 병행하다 202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에 취임하며 FA로 팀을 떠난 이후 무려 28년 만에 정식으로 요미우리에 복귀했다. 요미우리가 1군 감독직 외엔 지도자 선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순혈주의]]를 심하게 고집하진 않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스로 요미우리 원클럽맨 자리를 박차고 팀을 떠난 선수를 코치로 다시 불렀다는 점에선 나름 파격적인 인사라는 평. == 기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응원가는 요코하마 역대 응원가뿐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역대 응원가 중 가장 많은 호평을 받는 응원가 중 하나로 유명하다.[* 90년대의 요코하마 선수 응원가는 다른 구단의 선수 응원가와 비교하여 작곡센스가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다.] 나중에는 좌타 거포 유망주 [[나이토 유타]]에게 이어졌으나 나이토는 주전 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방출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youtube(F1wV7bQnMBk)] ||白い流れ星 大きく舞い上げろ  하얀 유성을 커다랗게 흩날려라 시로이 나가레보시 오오키쿠 마이아게로 冴えたホームラン 見せてよ駒田 선명한 홈런을 보여줘 코마다 사에타 호-무란 미세테요 코마다|| 반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시절 응원가는 여타 응원가들처럼 신나는 분위기이지만, 얼굴이 귀엽다는 가사 때문에 병맛 응원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심지어 처음 나올 당시엔 가사 첫 부분이''얼굴이 긴 코마다"나 "얼굴은 귀여운 3급품"이라고 불렸다고. [youtube(r_0-bpmpa9A)] ||顔はかわいい駒田 打ったボールは一級品 얼굴은 귀여운 코마다 친 공은 일품 카오와 카와이이 코마다 웃타 보-루와 잇큐-힌 打て打てジャンボだ 一発駒田 ライトスタンドへ 쳐라 쳐라 점보다 한방 코마다 라이트 스탠드에 우테 우테 쟘보다 잇파츠 코마다 라이토 스탄도에|| 이외에도 워낙 오래 전 사용했던 응원가라 정확한 곡은 전해져오지 않으나[* 다만, 대다수의 자료에 의하면 해당 응원가의 원곡은 1982-86시즌까지 요미우리에서 백업 [[포수]]로 뛰었던 사사모토 신지의 전용 [[https://www.youtube.com/watch?v=jF-qEVTZ4LI&t=1s|응원가]]로 추정된다.] 데뷔 초창기에 썼던 1번째 응원가도 있었는데, 이 응원가는 더욱 압권으로, ||駒田の顔は ロバの顔だマヌケだ 코마다의 얼굴은 [[나귀]] 얼굴이다 엉뚱하다[* 여기선 최대한 좋게 보아 엉뚱하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 마누케(マヌケ)는 '''얼간이, 멍청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코마다노 카오와 로바노 카오다 마누케다 ジャンボスタンド一跨ぎ それゆけ駒田ダダ 점보가 스탠드를 넘는다 나아가라 코마다 다그닥 쟘보 스탄도 히토마타기 소레유케 코마다 다다|| 응원을 하는 건지 사람을 비하하는 건지 모를 황당한 내용으로 작사되어 있었다. 장녀인 코마다 마코(駒田真子)는 [[마작]]업계에서 프로로 활동하고 있다. 외모만 보면 굉장히 순하고 누구한테 화도 못낼거 같이 생겼지만 인자한 얼굴에 걸맞지 않게 의외로 한 성격한다. 야쿠르트와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을때 [[후루타 아츠야]]를 냅다 갈겨버리려고 득달같이 달려든적도 있을 정도.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NPB)]]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62년 출생]][[분류:1981년 데뷔]][[분류:2000년 은퇴]][[분류:미야케정 출신 인물]][[분류:내야수]][[분류:외야수]][[분류:좌투좌타]][[분류:명구회 멤버]][[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