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카에타누 벨로주}}}[br]Caetano Belos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etano-veloso_last.jpg|width=100%]]}}}|| || '''본명''' ||Caetano Emanuel Viana Teles Veloso || ||<|2> '''출생''' ||[[1942년]] [[8월 7일]] ([age(1942-08-07)]세) || ||[[브라질]] [[바이아주]] 산투 아마루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브라질)] || ||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가, 정치 활동가 || || '''장르''' ||MPB, [[삼바]], [[보사 노바]]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etano-veloso_early.jpg|width=100%]]}}} || || 젊었을 적 || Caetano Veloso[* 포르투갈 발음 병기는 kaeˈtɐ̃nu veˈlozu] [[브라질]]의 뮤지션. 브라질의 [[밥 딜런]]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민 뮤지션으로 꼽힌다. 본명은 카에타누 이마누에우 비아나 텔리스 벨로주 Caetano Emanuel Viana Telles Veloso. [[보사노바]]와 [[삼바]] 같은 풍부한 브라질 음악의 자산을 [[사이키델릭 록]]과 [[재즈]] 같은 서구 음악과 시적인 가사를 도입하면서 MPB로 대표되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넓히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로 한국에 유명하지만 음악적 스펙트럼이 워낙 넓고 깊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편. 특히 초기작들은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보다는 보사노바와 브라질 전통 음악에 영감을 받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사이키델릭 록/팝에 가깝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 참고로 어머니는 백세인이다. 1907년생으로 타계 당시 연세가 무려 '''105세'''(!) 아버지 역시 백세까진 아니더라도 80대로 오래 사셨다.] 사이에서 산토 아마로에서[* [[사우바도르]] 교외 지역.] 태어났다고 한다. 형제가 상당히 많았던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7남매 중 다섯째라고. 동생은 [[마리아 베타니아]]로 카에타누를 따라 가수로 성공했다. [[보사노바]]의 주역이었던 [[주앙 지우베르투]]의 음악을 듣고 음악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다.[* 덕분에 호앙하고는 사석에서 친하다고 한다. 호앙은 카에타누를 뛰어난 후배로 지칭했으며, 카에타누 곡을 가져다가 커버하기도 했다.] 때마침 그가 살던 사우바도르는 [[브라질 흑인]]들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여기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동생 마리아와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대학 동문이자 동갑내기 평생 지기인 [[지우베르투 지우]]을 처음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는 1967년 'Alegria, Alegria'와 동료 [[가우 코스타]]와 함께 만든 합동 앨범 Domingo를 발표하면서 브라질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다만 처음엔 브라질 관중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Alegria, Alegria'를 비트 보이즈와 함께 처음 연주한 TV 레코드’ 방송국에서 주최한 제3회 ‘Brazilian Popular Music’ 페스티벌에서는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곡은 브라질 청년 세대에게 지지를 받고 히트곡이 되었고 카에타누는 이 곡이 실린 첫 앨범을 통해 뜨로삐까이아/MPB 흐름의 중심 인물로 부각하게 된다. 당시 브라질은 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 좌파 히피였던 카에타누는 곧 독재 정권의 표적이 된다. 결국 투옥하는 수난을 거쳐 질베르투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런 수난 속에서 음악적 기량이 부쩍 늘어 투옥과 망명 도중 나온 셀프 타이틀 앨범 두 장과 ''Transa''는 MPB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으로 꼽히게 된다. 이후 정치 상황이 다소 안정이 되자, 1972년 귀국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안정되었다지 브라질은 1985년까지 독재 정권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발표한 ''Araçá Azul''는 과격한 실험으로 흥행 참패를 겪기도 했다. 카에타누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앨범 작업을 이어가면서 MPB 장르에서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1980년대 월드 뮤직 붐으로 브라질 밖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해 [[토킹 헤즈]]의 [[데이비드 번]], [[커트 코베인]], [[벡]]의 지지를 받았으며 201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평단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 삽입된 ''Cucururu Paloma''와 카페 벨로주로 인지도가 높다. 덕분에 2016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로 내한하기도 했다. == 기타 == 결혼을 두 번 했으며, 큰 아들 모레누 벨로주 역시 음악을 하고 있다. [[분류:브라질 남가수]][[분류:브라질의 작곡가]][[분류:1942년 출생]][[분류:사우바도르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