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파일:external/x57img.peps.jp/44.jpg|width=250]] 蔭山和夫([[1927년]] [[1월 16일]] ~ [[1965년]] [[11월 17일]])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오사카시 출신. 이치오카 중학-[[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시절 주장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1950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에 입단, 이듬해 타율 0.315, 42도루, 3루타 13개로 맹활약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수상하였다.[* 일본 프로야구의 신인왕은 1950년 신설되었는데, 1951년 신인왕은 1950년 입단 선수까지 포함하여 선정하였다. 1951년 센트럴리그 신인왕도 카게야마와 같은 2년차였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츠다 키요시였다.] [[3루수]]로서 나무랄 데 없는 출중한 수비[* 1루수 이이다 토쿠지, 유격수 키즈카 타다스케, 3루수 카게야마 카즈오의 내야진은 모두 빼어난 수비력을 보여 '백만 달러의 내야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를 보여주었고, 슬러거는 아니었지만 1950~1953년 3년 연속 3루타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빠른 발과 날카로운 타격을 자랑했다. 10시즌간 '''881안타, 53홈런, 302타점, 214도루, 타율 0.264'''라는 통산 성적을 남겼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60년 시즌부터 난카이의 수석 코치로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을 보좌하였고, 1962년 성적 부진으로 일시 퇴진한 츠루오카 감독을 대행하여 팀을 이끌며 그해 난카이가 시즌 2위를 마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야구계에서는 카게야마를 뛰어난 이론가로 추켜세울 정도로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정작 카게야마의 이름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1965년 시즌 후 츠루오카 감독의 후임으로 난카이 감독에 취임한 이후였다. 수석 코치로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지만 불과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감독이란 중책을 맡은 카게야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로 고생하고 있었고, 노이로제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매일 밤 [[브랜디]]와 수면제의 힘에 기대어 간신히 잠을 잘 지경이었다. 결국 감독 취임 4일만인 1965년 11월 17일, 여느 때와 같이 브랜디를 곁들여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자리에 든 카게야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그의 어머니가 황급히 119에 신고하였고 카게야마는 구급대에 의해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병원으로 이송될 때 카게야마는 어머니에게 "[[노무라 카츠야|노무라]]한테 할 말이 있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인은 '''급성 부신피질 기능부전''' 이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질병이었다. 츠루오카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이 카게야마를 감독으로 새출발한 난카이는 카게야마의 죽음으로 단번에 분위기가 [[개판 5분전]]이 되었고, [[치바 롯데 마린즈|도쿄 오리온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산케이 아톰즈]]와 이적 협상을 벌이고 있던 츠루오카는 비보를 맞이한 친정팀 난카이의 사정을 모른 척 하지 못하고 다시 난카이 감독으로 복귀하며 분위기는 일단 수습이 되었다. 츠루오카는 이후 1968년 까지 3시즌을 추가로 난카이의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한편으로 츠루오카는 카게야마의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하고 "내가 카게야마를 죽인 것 같다" 면서 비통해 했다고 한다. 덧붙여 카게야마의 감독 재임기간 4일은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단기록으로 남아있다(...).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27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오사카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