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구려 왕후)] '''雉姬''' (? ~ ?) [목차] == 개요 == [[고구려]] [[유리명왕]]의 후실로 한족 출신. '''역대 [[한국사]] 모든 일국 지도자의 '[[외국]][[국제결혼|(혈통) 출신 배우자']]들을 통틀어, 기록에 남은 최초의 외국인 배우자.'''이다 시대가 흐르고 흘러 [[제국대장공주]]([[고려]]로선 최초) ~ [[노국대장공주]], [[프란체스카 도너]]([[대한민국]]의 초대 + 2020년 현재까지 유일) 등등이 그 바톤을 이어간다. 참고로 [[이방자]]는 남편 영친왕이 국가 지도자는 아니었기에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순종 승하 후에 [[이왕]]이라는 지위를 얻긴 했지만 어차피 [[경술국치]] 후이기때문. == 행적 == 본래 [[한나라]] 사람의 딸로, 즉 한족(漢族) 출신이었다. 기원전 17년에 [[유리명왕]]의 왕비인 송씨(松氏)가 죽자 왕에게 시집을 가서 후실이 되었다. 이때 [[화희]]라는 여인도 함께 유리명왕의 후실이 되었다. 치희는 [[화희]]와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었는데, 아무리 싸워도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심하게 다투었던지 [[유리명왕]]이 두 사람을 한 궁에 두지 않고 양곡 (涼谷)의 동,서쪽에 2개의 궁을 따로 지어서 각기 기거하게 할 정도였다. 하루는 [[유리명왕]]이 기산(箕山)[*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후대의 기록에도 몇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왕실 사냥터로 여겨진다.]으로 [[사냥]]을 하러 7일동안 궁을 비웠는데, 그 동안에 또다시 [[화희]]와 싸웠다. 그때 [[화희]]가 '''"한나라의 천한 년(婢妾) 주제에 무례하다."'''라며 치희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 치희는 왕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와는 적대 관계에 있던 한나라 출신이어서 그런지 고구려 내에서는 은근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희가 치희를 모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유리명왕]]은 말에 채찍질을 해가며 급히 치희를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슬피 여긴 [[유리명왕]]은 꾀꼬리가 노래부르는 광경을 보고는 그 유명한 [[황조가]]를 지었다. [각주] [[분류:몰년 미상]][[분류:한나라/인물]][[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고구려의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