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학술원 회원)] [include(틀:조선어학회 33인)] [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최현배}}}[br]崔鉉培 | Čhoi Hyŏn-pai[* [[https://imgur.com/S4ALaaW|로마자 이름 출처]]]'''}}}}}}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iusm.co.kr/120697_16772_23_33.jpg|width=100%]]}}} || || '''호''' ||외솔[* "외따로 서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 || '''본관''' ||[[경주 최씨]][*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7세 석(錫) '''현(鉉)''' 종(鍾) 항렬. 아버지 최병수(崔炳壽)는 16세 '''수(壽)''' 만(晩) 항렬.] || ||<|2> '''출생''' ||[[1894년]] [[10월 19일]] || ||[[경상도]] [[울산광역시|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울산)|동동리]][*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251125&categoryId=35978|#]]][br](現 [[울산광역시]] [[중구(울산)|중구]] [[동동(울산)|동동]]) || ||<|2> '''사망''' ||[[1970년]] [[3월 23일]] (향년 75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부모''' ||[[아버지]] 최병수 || || '''배우자''' ||이장련[* 외솔보다 4살 연상이었다. 외솔이 작고하고 20일도 안 된 1970년 4월 9일에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당뇨로 별세했다. 가족들이 외솔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항상 문병을 오던 외솔이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외솔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07~311쪽 참고할 것.] || || '''자녀''' ||최영해 || || '''친인척''' ||손자 [[최동식]] || || '''학력''' ||[[병영초등학교|일신학교]] {{{-2 (졸업)}}}[br][[경성고등보통학교]] {{{-2 (졸업)}}}[br][[히로시마대학|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2 (졸업)}}}[br][[교토제국대학]] 문학부 {{{-2 ([[철학]][* [[교육학과|교육학 전공]]] / [[학사]])}}}[br][[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대학원]] {{{-2 ([[교육학]] / 수료[* 오랫동안 석사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일본 제국]]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고 학사 다음이 바로 박사였다. 그리고 교토제대 문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수학만 했지 졸업은 하지 않았다.])}}}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44호 || || '''상훈'''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훈 {{{-2 ([[1962년]] 수훈)}}}[* [[1967년]]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현재는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칭되었다.] || || '''종교''' ||[[개신교]][* 출처는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10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문학인. ''''한글 보편화'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며 이를 인정받아 1962년 [[https://namu.wiki/w/%ED%9B%88%EC%9E%A5(%EC%83%81%ED%9B%88)/%EB%8C%80%ED%95%9C%EB%AF%BC%EA%B5%AD#s-6.2.1|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 [[최진립]] 장군의 10대손이다. 큰 아들 정음사 대표 [[최영해]] 선생으로 정음사에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고, 최영해 선생 큰아들이 고려대 화학과 [[최동식]] 교수이다. == 생애 ==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광역시|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울산)|동동리]](現 [[울산광역시]] [[중구(울산)|중구]] [[동동(울산)|동동]])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47&evntdowngbn=Y&indpnId=00000137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거주했다]]. 출생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살면서 [[병영초등학교|일신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상경하여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국문학|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이수하였다.[* 이곳에서 받은 '익힘,,에,,주,,는,,글'(중등과정 수료증)과 [[풀어쓰기]]로 적힌 '맞힌보람'(고등과정 졸업장)의 [[스캔본#8-2|영인본]]들이 외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시|히로시마]]에 있는 [[히로시마대학|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3월에 졸업했다.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 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동래군]][* 현재의 [[부산광역시]] 일대가 그 당시에는 대부분 동래군이었고, 중부의 부산항 일대만 부산부였다. 동래군이 부산시에 거의 대부분 합병된 건 좀 더 먼 미래인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 때였고, 1978년에는 남은 영역마저 양산군에 합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1995년 부산광역시로 개편되면서 지금의 기장 외곽 지역까지 모두 흡수하고 지금에 이른다.]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교토시|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석사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석사 학위의 개념이 없었다. 일본이 석사학위가 없었던 1950년대 이전에는 학사학위가 석사학위를 대체하는 학위였다. 지금은 학사 학위가 흔하지만 그 시대에는 학사 학위 가지고 교사나 대학교수가 될 정도로 석사와 비슷한 학위였고 1920년대 이전까지 박사학위는 [[문부성]]에서 수여하였지만 1920년대 학위법 제정으로 일반 대학에서도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석사학위가 도입된 것은 1950년대였으며 석사 학위의 역사가 비교적 짧아 석사 대신 '박사 전기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는 대학들도 많다.]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3606|신명균]](申明均),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74&docId=578992&categoryId=46674|심의린]](沈宜麟),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321063&categoryId=34328|정열모]](鄭烈模)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로써 교육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표준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이 사업은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는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학파가 주장하는 표음주의 맞춤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 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군|홍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47&evntdowngbn=Y&indpnId=00000137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해당 판결문]]을 보면 창씨명이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씨만 새로 만들었고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 읽는 방식만 바꾼 것이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최초 정치 여론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교과)|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통과시켰다. 후에 한글학회 상무이사와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1948년]]에 한국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었다.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역사|울산군]] 을 [[선거구]][* [[울산광역시|울산군]] [[농소동|농소면]], [[북구(울산광역시)#강동동|강동면]], [[온양읍|온양면]], [[웅촌면]], [[범서읍|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언양읍|언양면]], [[상북면(울주)|상북면]], [[삼남읍|삼남면]]]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연희대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문과대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출범하자 초대 부총장에 취임했다.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다.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연세대학교]]는 [[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으로 명명하였다.[* 참고로 신관인 제2인문관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연희전문을 한국학의 메카로 이끈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으로 명명했다.]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원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주시경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가 1981년 주시경의 묘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최현배의 묘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 기타 == [[울산광역시]] [[중구(울산)|중구]] [[동동(울산)|동동]] 613번지에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http://www.oesol.kr/|기념관 누리집]], [[http://blog.junggu.ulsan.kr/5|운영 시간 안내]] 한 때 [[울산 버스 912|912번]] 지선 버스가 여기를 종점으로 삼기도 했지만, [[2013년]]부로 한블럭 아래 병영초등학교 정류장을 거쳐 더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또한 [[우정혁신도시]]에는 그의 호를 딴 외솔초등학교와 [[외솔중학교]][* 본래는 울산동중학교로 약사동에서 혁신도시로 이전한 학교이며, [[2016년]]부터 현재의 교명으로 바꿨다.]가 있다.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학자였다. 생전에 찍은 다른 사진들만 봐도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일설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에서 발견되었을 때 큰 소리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 식민지기라는 역사 배경 때문인지 최현배가 국어학자로서 가지는 사명감은 남달랐으며, 평생토록 극히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후배인 문학박사 [[양주동]] 교수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많았으며[* 일화가 참 다양하지만 특히 "어이쿠 국보가 넘어진다!"와 "내가 모르는 건 학생들도 몰라도 돼", "(택시기사에게) 국보가 탔으니 안전운전 부탁하오"가 유명.] 아들 최신해 박사는 가끔씩 해학적 면모를 보여주곤 했는데, 외솔은 그런 게 일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희전문에서 최현배의 지도편달을 받았던 교수들은 옆에서 누가 "최현배"나 "외솔"이란 말을 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떴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순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적으로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라는 낱말 사용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3인칭#s-5|그녀]] 항목 참조.]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 [[1955년]] [[조선일보]]에 [[서울]]이란 이름은 수도 이름으로 맞지 않으므로[* 서울이란 말 자체가 수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수도 이름이 '수도'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게 이 주장의 근거다. 원문은 [[1955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 논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도의 이름의 뜻이 그냥 '수도'인 국가가 존재하기는 한다. 가령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시|교토]]와 현 수도인 [[도쿄도|도쿄]]는 각각 '수도', '동쪽 수도'라는 뜻이며,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시|베이징]]도 '북쪽 수도'라는 뜻이고,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스타나]]도 그냥 '수도'라는 뜻이다.]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승만]]도 이것에 관심을 보여서 바꾸려고 논의는 했는데, 이승만 밑의 참모진들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꾸자고 하는 통에 최현배 선생이 지금 장난치냐고 분노했으며 [[김형민(정치인)|김형민]] 초대 [[서울시장]]도 '서울'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대통령도 이런 억지스러운 아부에는 반대했기에 '서울'이란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건 [[서울특별시/역사#s-3.2]] 참고. [[20세기]]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의 후신)에 다닌 사람이라면 외솔의 영향으로 당시 학교 곳곳에 남아있던 순우리말 사용의 흔적을 보고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의 [[주차장]]은 20세기 말까지도 “둠”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용어의 순우리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인혁 교수의 “의학용어집”이 대표적인 예. [[한국어]]의 [[가로쓰기]]는 최현배 박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위 식자들은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가로쓰기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세로쓰기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법조문이나 공문에서 흔히 보는 낫표(「」,『』)가 바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이다.] 최현배 박사가 아니면 이들의 반발로 오늘날에도 세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글 [[풀어쓰기]] 및 이를 편하게 쓰기 위한 글씨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풀어쓰기' 문서 참조. 사후에 그를 기리는 단체인 외솔회가 출범하였고 이 단체에서는 매년 그의 호를 딴 외솔상을 시상한다. 한국 [[정신건강의학과]]의 원로 의사이자 [[수필가]]로도 유명했던 최신해 박사(崔臣海, 1919-1991)가 그의 아들이다. 외솔의 아들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말년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여러 성문화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근엄한 노교수답지 않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속하다 느낄 정도로 해학적이고 맛깔나는 문체가 일품이다. 최신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인데, 전공을 살려 한글과 인간 발성기관 구조 간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스승으로, 윤동주는 외솔을 매우 존경하여 강의를 수강하고 그의 저서를[* <우리말본>, [[1937년]].] 탐독했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는 거의 전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죽을 때까지 맡았고, 이후 제자였던 허웅이 32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게 된다. [youtube(U95wVOn4fIo)] [youtube(5NysnDjaVn4)]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를 통해 최현배 선생을 기리고 있으며 그의 고향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매년 그와 관련된 글짓기 행사가 열리는 등 울산광역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그를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군 을) || [[무소속]] || 6,346표 (16.57%) || 낙선 (2위) || || [[분류:대한민국의 문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국어교사]][[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중구(울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언어학자]][[분류:1894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경주 최씨 사성공파]][[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분류:교토대학 출신]][[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