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최씨]][[분류:의령군 출신 인물]][[분류:1882년 출생]][[분류:191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고려대학교 출신]] || 성명 ||최광(崔廣) || || 이명 ||최병찬(崔秉瓚) || || 본관 ||[[경주 최씨]] || || 생몰 ||[[1882년]] [[4월 10일]] ~ [[1918년]] [[11월 25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병규]]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경상남도]] [[의령군]]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최광은 1882년 4월 10일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전문과(經濟學專門科)를 졸업한 뒤 [[탁지부]](度支部)에 들어가 1910년 3일까지 탁지부 주사를 역임했다. 1908년 영남 지방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박정동(朴晶東)[*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정동]]과 동명이인이다.]·[[이하영(1858)|이하영]](李夏榮) 등 경상도 인사들이 조직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했다. 교남교육회는 이때 29명의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는데, 그는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과 함께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10년 3월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러시아로 망명한 뒤 그해 8월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이의 무효를 선언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宣言書)가 발표될 때 서명하여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다. 1911년에는 [[이갑]]을 보좌하여 미주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국민회의 원동(遠東) 경영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페테스부르크 지역의 경영 실무를 서초(徐超)와 함께 담임하는 한편, 미중서 발행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원동(遠東)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3월 26일 개최된 국민회 시베리아지아총회 제1회 대의회(代議會)에서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강(독립운동가)|이강]]·김탁(金鐸)과 함께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선정되어 총회의 자치규정(自治規程)을 기초하여 총회의 승인을 받아 통과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병에 걸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다가 1918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최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