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목차] == 가족사 == [[전계대원군]]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종로구|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했다. '''[[숙종(조선)|숙종]]의 서자인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전계군]]의 서자'''이다. 즉 직계 조상 4대가 모두 [[서자]] 출신이다. 게다가 선왕 [[헌종(조선)|헌종]]보다 [[항렬]]이 한 단계 높아서 원래는 종법상 [[조선/왕사|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자]]는 커녕 남자 왕족 자체가 거의 씨가 말라 없던 때라 [[서자]]고 [[항렬]]이고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조선]] 초기라면 [[조선/왕사|왕위]]는 커녕 평생 대궐 구경이나 한 번 할까 말까 했을 그에게 [[조선/왕사|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철종마저 또 [[아들]]을 보지 못하면서 결국 [[조선/왕사|다음 왕위]]는 철종과 혈통상 '''무려 17촌'''이나 되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잇게 된다.[* 그나마 고종은 [[서자]]가 아니고 [[인조]]의 적자인 3남 [[인평대군]] 이후로 계속 적출로만 이어진 방계 왕손이긴 했다.][* 17촌 관계인 고종과는 나이가 21살 많다.] 철종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조선)|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전계군 이광]]이다. [[정조(조선)|정조]] 재위기인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권신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전계대원군|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교동도|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신유박해]] 등을 이유로 사사당하지만 [[전계대원군|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순조 30년인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순조 31년)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숙빈 임씨|사도세자의 후궁]]의 아들인 [[은언군]]과 첩(전산군부인 이씨)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전계군]]의 서자인 것이다.[* [[완양부대부인|이광의 본부인 최씨]]가 [[1840년]](헌종 6년) 사망했는데 철종은 [[용성부대부인|염씨]] 소생으로 [[1831년]]생. 정실 사망 전에 계실을 들이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다가 사후 추증도 본부인 최씨(민진용의 역모 때 사사된 [[이원경]]의 모친) 일가만 추증하려던 것을 철종의 생모 염씨 일가도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분명 서출이 맞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 취급을 받는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되지도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덕완군]]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조선/왕사|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封君)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절차상의 문제이고 [[고종(대한제국)|고종]]도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전계대원군|아버지]]나 [[회평군|큰형]]은 아예 자기가 왕이 된 후 추봉하였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몰락한 [[종친]] 신분일지언정 [[조선/왕실|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대우 받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 [[1830년]](순조 30년), 아버지 [[전계대원군|이광]]이 귀양에서 풀려났을 때 두 형들은 4살(이원경), 3살(이경응)이었으니 큰 차이는 없었다.] 아버지 [[전계대원군|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조선]]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죽은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회평군|이명]][* 李明, 혹은 이원경(元慶), 후에 회평군(懷平君)으로 추숭.]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이경응|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조선/왕실|왕족]]이 아닌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살고 있었다. == 즉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H9l__ybD1I)]}}} || || {{{#gold '''KBS 〈역사실험 - 왕이 된 나무꾼, 철종 그는 어떻게 왕이 되었나〉'''}}} || 이원범이 19살이던 [[1849년]](헌종 15년)에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조선)|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승하]]했다.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헌종(조선)|헌종]]의 7촌 재종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 [[정조(조선)|정조]]의 아버지를 생부인 [[사도세자]]로 보지 않고 [[조선/왕실|왕실]] 족보(선원록)에 따라 양부인 큰아버지 [[효장세자]]로 본다면 이원범은 [[헌종(조선)|헌종]]의 9촌 재재종숙이자 [[순조]]의 7촌 조카가 된다.]을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순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조선/왕사|국왕]]으로 지명했다.[* 한편,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욱이 있었지만(큰형은 역모로 이미 사망), 대체로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조선)|선조]]와 [[효종(조선)|효종]], [[영조]],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있다. 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자세한 건 아래 각주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knsu.ac.kr/201309222209110.jpg|width=100%]]}}} || || {{{#gold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 [[평양]] 소재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 자신을 [[조선/왕사|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은언군|할아버지]]나 [[회평군|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때 철종의 형 [[영평군(1828)|이욱]]은 도망가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과 주민들의 설득과 이해로 결국 [[조선/왕사|임금]]이 타는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집을 지어 확장했다고 한다. 이 궁은 지금도 [[강화도]]에 남아 있는데 용흥궁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 오해 === 세간에 철종의 즉위와 관련한 오해들이 많이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 안동 김씨가 헌종과 가까운 왕손들을 제치고 다루기 쉬운 일자무식인 철종을 옹립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철종이 왕이 된 것은 '''그가 헌종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조선)|효종]] - [[현종(조선)|현종]] - [[숙종(조선)|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조선)|숙종]]은 6남을 두었으나 [[영조]] 빼고는 조졸하거나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영조]]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후손을 남긴 건 [[사도세자]]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들을 다섯이나([[의소세손]], [[정조(조선)|정조]],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 낳았으나 그중 3남([[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고, [[적자]]로서 후계를 이은 [[정조(조선)|정조]]의 직계는 [[헌종(조선)|헌종]]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은 오직 '''[[은언군]]의 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원범은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사도세자]]의 진짜 유일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조선)|헌종]]과 촌수가 그나마 가장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살아있던 [[은언군]]의 친손자들 그러니까 철종과 같은 입장인 [[왕족]]은 철종 말고도 이복형 [[영평군(1828)|이욱]][* 다만, [[영평군(1828)|이욱]]은 소갈증([[당뇨]]) 환자였기에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사촌형이자 [[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익평군 이희]]가 있었다.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 [[익평군]]이 가장 서열이 높았다. 그는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고 [[영평군(1828)|이욱]] 역시 파릇파릇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저들을 제치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리버리한 나이 어린 19세의 이원범을 굳이 다음 [[조선/왕사|왕]]으로 택했고 [[수렴청정]]을 행했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이 쉽게 다루기 위해 옹립했다는 추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왕자]]가 아닌 왕손이 임금이 되려면 [[순조|선왕]]의 [[양자]]로 반드시 입적해야 했는데 [[익평군]]과 [[영평군(1828)|이욱]]은 각 집안의 종손이기 때문에 [[조선/왕사|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고, 필요에 따라 [[장남]]이 [[입양]] 가는 경우들도 꽤 있었다. 일례로 [[흥선대원군]]의 형들인 [[흥녕군]]과 [[흥완군]]의 [[양자(가족)|양자]]들은 [[완림군|동생들의]] [[흥친왕|장남]]이었다. 익평군은 원래 [[풍계군]]([[은언군]]의 아들이자 [[은전군]]의 [[양자(가족)|양자]])의 친자인데, [[은언군]] 종가를 잇기 위해 [[상계군]](은언군의 장남)에게 입적했다. 이 익평군이 [[조선/왕사|왕위]]를 이으려면 [[순조|선왕]]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또 [[입양]]을 보내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일례로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된 [[선조(조선)|선조]]는 원래 [[덕흥대원군|덕흥군]](명종의 이복형)의 아들이지만, [[조선/왕사|왕]]이 되기 전에는 [[복성군]](명종의 이복형)의 [[양자(가족)|양자]]였다. 반면 [[야사(역사)|야사]]에서 철종 대신 유력한 [[조선/왕사|왕위 계승자]]로 꼽히던 인물로 알려진 [[경원군(1842)|이하전]]이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경우, 생물학적 혈통을 따지면 오히려 이원범보다 더 멀었다.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은 [[덕흥대원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정조의 이복 동생)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간 것이지 실제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철종의 사촌이라던 [[이인응|경평군 이세보]] 역시 실제로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었다가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에게 입적한 경우이고, 그 시기도 철종 즉위 이후였다. 그러니 [[경원군(1842)|이하전]], [[흥선대원군|이하응]], [[이인응|이세보]]는 혈통이나 법통(종법) 면에서 보면 절대 철종을 제치고 [[조선/왕사|왕]]이 될 수 없었다. * 순원왕후 김씨와 신정왕후 조씨가 힘겨루기를 하다가 순원왕후가 이겨서 어거지로 철종을 등극시켰다?[* 가령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만 하더라도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의 갈등을 그린 내용이 나온다.] * 실상을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위에도 나왔듯 철종의 [[조선/왕사|왕위 계승]] 자체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는 형태였다. 무엇보다 [[순원왕후]]는 당시 명실상부한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큰어른으로 [[신정왕후 조씨]]는 힘겨루기는커녕 그녀의 말에 감히 토 달지도 못했다. [[조선]] 후기에, 그것도 [[조선/왕실|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큰 반례로 철종이 죽을 때인데 철종은 '''[[신정왕후 조씨]]'''[* 철종이 죽을 당시 [[신정왕후 조씨]]는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죽고 [[조선/왕실|왕실]]의 최고어른인 [[대왕대비]]가 되어 있었다. 즉, 철종은 [[조선/왕사|왕]]으로 즉위할 때 [[순조]]의 아들로 양자 입적되었기 때문에 철종은 [[효명세자]]의 동생이 된다. 그렇기에 [[효명세자]]의 [[아내|비]]인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에게는 법적으로 [[형수]]가 된다.]에게 [[옥새]]를 맡겼고, 철종 사후 [[조선/왕사|왕]]이 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신정왕후 조씨]]의 결정으로 [[조선/왕사|왕]]이 되었는데 이 때 철종의 [[조선/역대 왕비|왕비]]인 [[철인왕후|철인왕후 김씨]]가 살아있었고 [[김좌근]], 김우근 등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도 당연히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힘겨루기로 [[조선/왕사|왕]]이 결정되었다면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함부로 [[조선/왕사|왕]]으로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 안동 김씨가 철종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순원왕후가 억지로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친아들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로 만들었다? *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앞뒤가 바뀌었다. '''철종이 헌종이 아닌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이라 [[순원왕후]]가 본인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종 다음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철종 바로 아래인 [[헌종(조선)|헌종]]과 같은 [[항렬]]이었기에 [[효명세자]]의 [[양자(가족)|아들]]로 입적되었다. 물론 정석대로라면 바로 전 왕인 철종의 아들로 입적되어야 하긴 하다.] [[양자(가족)|양자]]는 [[아들]]과 같은 항렬의 일가 친척 중에서 들인다.[* 이보다 약 백년 뒤 [[이승만]]이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1937)|이강석]]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인 것이 논란이 된 것도 [[이승만]]과 [[이강석(1937)|이강석]]의 [[항렬]]이 아들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손자뻘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철종은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조선)|헌종]]의 7촌 재종숙이다. 재종숙이면 아저씨뻘이고, 아저씨뻘은 당연히 [[효명세자|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란 뜻이다. 설령 철종이 [[헌종(조선)|헌종]]과 같은 항렬이거나 아래 항렬이어서 [[신정왕후]]나 [[효정왕후]]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고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머니뻘이나 증조할머니뻘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선/왕실|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순원왕후]]가 살아 있는 이상 [[수렴청정]]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하는 것이고,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순원왕후]]가 철종을 [[순조]]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임에 따라, 철종은 족보상으로 전임 국왕인 [[헌종(조선)|헌종]]의 숙부(아버지의 동생)가 되었다. 철종 옹립 배경에 관한 루머들이 많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이 철종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절차와 과정에 큰 하자는 없었다. 다만, 저런 루머가 나돌 정도로 철종 시기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의 [[세도 정치|세도]]가 정말 극에 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생기긴 했다. 철종은 헌종의 7촌 재종숙뻘[* 혈통상 7촌이고, 앞 각주에서 언급했듯 [[영조]]가 세손(훗날의 [[정조(조선)|정조]])을 그의 친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요절한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가족)|양자]]로 삼았으므로 왕실 족보상으로는 9촌 사이가 된다. 물론 철종을 [[순조]]의 [[양자(조선)|양자]]로 삼으며 헌종과 철종의 사이는 족보상 3촌으로 확 줄게 되었지만 여전히 숙질 관계다.]이라서 항렬이 한 세대 높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오히려 헌종이 4살 많았다. [[전계대원군]]이 당시 47세란 너무 늦은 나이에 철종을 얻었기 때문이다. 헌종계가 [[종가]]라 세대 진행이 빨랐기 때문이란 의견도 있지만, [[전계대원군]]이 사촌 [[순조]]보다 오히려 5살 더 많은 것을 보면 그 이유는 아니다. 사실 [[은언군]]도 32세에 [[전계대원군]]을 낳았으나 정조가 순조를 무려 '''39세''' 때 낳았기 때문. [[헌종(조선)|헌종]]이 태어날 때는 아버지 [[효명세자]]가 19세, 할아버지 [[순조]]가 38세였고, [[순조]]보다 5살 많았던 [[전계대원군|전계군]]이 47세[* 이때 [[순조]] 42세, [[헌종(조선)|헌종]] 5세. [[효명세자]]는 1년 전 사망했다.]에 철종을 낳았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역전된 것.] 당시 철종이 즉위할 경우 [[종묘|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항렬]]이 하나 낮은 [[헌종(조선)|헌종]]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왕위 계승의 법칙|조선 왕위 계승 종법]]상 [[조선/왕사|다음 왕]]은 원칙적으로 선왕의 아래 항렬이나 같은 항렬에서 나와야 하는데, 철종은 [[헌종(조선)|헌종]]보다 나이는 적어도 한 항렬이 높았기 때문에 철종의 즉위는 이 원칙을 어긴 것이었다. 여담으로, [[조선왕조]]에서 이 원칙은 역대 [[정변]] 중 가장 정당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계유정난]]으로 [[조선/왕사|왕위]]에 오른 [[세조(조선)|세조]]를 제외하곤 모든 [[조선/왕사|왕위 계승]]이 지킨 것이다.] 이 문제가 구체화된 형태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373#self|기유예론(己酉禮論)]]'''이었다. [[조선/왕사|임금]]이 [[종묘제례|제사]]를 받들 때 선왕의 호칭과 자신의 호칭을 말해야 하는데,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을 [[조선/왕실|왕실]] 족보(선원록)대로 숙질 관계로 칭할지, 그냥 즉위 순서대로 부자 관계에 준하여 칭할지가 관건이었다. 전자를 따를 경우 철종은 헌종의 제사를 받들 때 "[[헌종(조선)|황질]](皇姪, 훌륭하신 '''조카''')께 고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호칭이 다소 우스운 건 둘째치고 조천(祧遷)[* [[조선]]의 [[종묘]] 제도상 임금은 자신의 4대조 신위까지만 정전에 모신 후, 5대조부터는 신위를 업적에 따라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조천이라고 했다.][* 사실 조천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사후 추존된 왕에만 해당되는 이야기. 어지간한 왕의 신위는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지지 않고 종묘 정전에서 지금까지도 모셔지고 있다.] [[조선/왕사|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이 문제는 의외로 꽤 민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천과 관련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550|신해조천의(辛亥祧遷議)]] 예송'''이 불거졌다. 철종의 경우 즉위 순서대로라면 진종([[효장세자]] 추존), [[정조(조선)|정조]], [[순조]], 익종([[효명세자]] 추존), [[헌종(조선)|헌종]]에 이은 [[조선/왕사|왕]]이었으므로 5대 전 임금인 [[효장세자|진종]]은 조천되어야 했다. [[추존]][[조선/왕사|왕]]이었기에 불천위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효장세자|진종]]은 왕실 족보(선원록)상 철종의 증조부였다.[* 철종의 혈통상 증조부는 [[사도세자]](장조)지만, [[정조(조선)|정조]]가 [[임오화변]] 이후 [[효장세자]](진종)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갔고, 철종 본인은 [[순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족보상 '진종-정조-순조-철종'이 된다.] 해서 당시 [[영의정]]이었던 권돈인은 족보상의 4대조인 고조부까지는 '''조천'''을 하지 않는 게 예법에 옳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족보상 고조부인 [[영조]]는 [[1782년]](정조 6년)에 진작에 세실(世室), 즉 불천위로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5대조로 따지든 4대조로 따지든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쪽에서는 이제 막 즉위한 임금으로 하여금 '[[조선왕조|제왕가]]는 [[조선/왕사|승통]](承統)을 중히 여기는 법'이라는 논리를 펴게 하여 [[효장세자|진종]]을 조천시켰다. 사실 권돈인의 주장대로라면 '[[효장세자|진종]]-[[정조(조선)|정조]]-[[순조]]-철종'의 계통이 완성되니, 철종과 항렬이 같은 [[효명세자|익종]]과 그 아들 [[헌종(조선)|헌종]]은 붕 떠 버리게 되므로 매우 위험한 문제였던 것. 그래서 당시 조야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여론전에 힘입어 대부분 조천에 찬성했다.[* 이 때문에 당시 [[종묘]] 5묘제는 [[태조(조선)|태조]]를 1묘, [[정조(조선)|정조]]를 2묘, [[순조]]를 3묘, [[효명세자|문조]](효장세자/익종)을 4묘, [[헌종(조선)|헌종]]을 5묘로 간주했다.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후에는 즉위 순서대로 [[순조]]를 2묘, [[효명세자|문조]]를 3묘, [[헌종(조선)|헌종]]을 4묘, 철종을 5묘로 간주했다.] 이 예송으로 권돈인은 물론이고 그의 배후로 지목된 '''추사 [[김정희]]''' 등이 유배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즉위 초기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의 세력 과시 성격도 있어 보인다. == 치세 == 자신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력이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를 [[조선/역대 왕비|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결국 [[순조]], [[헌종(조선)|헌종]]과 마찬가지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를 [[조선/역대 왕비|왕비]][* 출처 :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1851년]], 청 함풍(咸豊) 원년) 9월 25일 (정축)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209025_001|#]].]로 삼고 김문근은 '''국구(國舅, 왕의 장인어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철종은 즉위 시점에 이미 19세의 청년이었던 데다가 여러모로 공부한 바도 있었고, 즉위 후 제법 [[조선/왕사|군왕]]다운 위엄을 보였기에 [[수렴청정]] 3년 차인 [[1852년]](철종 3년)부터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철종이 직접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출처 :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1851년]], 청 함풍(咸豊) 원년) 12월 28일 (기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212028_001|#]].] 특히 어릴 적부터 서민들의 민생고를 직접 눈으로 본 철종은, 초기에는 여러 개혁 정책들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 안동 김씨|세]][[풍양 조씨|도]] 가문들의 반발과 비협조에 부딪혀 대부분이 불발되고 만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순조]]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철종은 딱히 [[제왕학]]을 교육받지 않아 현실 정치에 어둡고 [[조선/왕실|정통성]] 면에서도 좀 꿀렸으며, 무엇보다도 [[조선/왕사|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했기에 국정 장악이 쉽지 않아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을 막지 못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고종기 농민 봉기.png|width=100%]]}}}|| || {{{#gold {{{-1 '''철종~고종기의 농민 봉기를 나타낸 지도.'''}}}}}}[* 다만, [[홍경래의 난]]은 [[순조]] 재위기(순조 11년, [[1811년]])에 일어났다.] || 따라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했고 결국 굶주린 민심이 폭발하여, [[경상도]] [[진주시|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시|전주]](全州) 등지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임술민란]])'라 한다. 이때 조선 조정은 대책은커녕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의욕을 보인 것은 [[조선/왕사|임금]]인 철종 혼자나 다름없었다.[* 출처 : '''《[[철종실록]]》 4권, 철종 3년([[1852년]], 청 함풍(咸豊) 2년) 10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310022_005|#]].] [[임술농민봉기]]가 터졌을 때는 "[[조선|우리]] [[백성]]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를 외치면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제법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그들의 나팔수 정원용 등이 "[[환곡제도]]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없애자니 애석한뎁쇼? 급하게 없앴다가 부작용이 나면 어쩔까요?"라고 반대하며 슬슬 시비와 딴죽을 걸었고, 그 사이에 [[임술 민란|농민 봉기]]가 대부분 정리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식으로 얼버무리며 흐지부지 되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말세론'이 면면히 퍼졌고, 교주 [[최제우]]가 창시하고 만민 평등을 제창한 '[[동학]](東學)'이 등장한다. 그 외에 철종 때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종계변무]] 사건이 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에서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이자 간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써놓자 [[조선]]에서 이를 고치려 노력한다. 이후 큰 줄기의 일은 [[선조(조선)|선조]] 때 해결되었으나, 뒷일이 철종 대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즉, [[청나라]]의 어느 학자가 쓴 서적[*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이다.]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당시 사행사로 [[청나라|중국]]에 가 있던 윤치수가 전사(典事)를 보내어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한다.[* 출처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월 8일 (을묘)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401008_001|#]].] 하지만 [[청나라]]의 반응은 "그런 미미한 서적에 대해선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런데 윤치수는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이 책을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철종은 위에서 보듯 길고도 아름다운 [[시호]][* 당시에 추가된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책을 윤치수는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분에서 또 다른 의문을 사기도 한다. 여담으로 [[청나라|중국]]에 보내는 연행사에 [[왕족]]인 [[이인응|경평군 이호]]를 임명했는데, 이에 대해 숭실대 하정식 교수는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사행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자 왕족을 직접 보내 정보를 얻어 보려고 노력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20대 애송이 왕족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세도 정치가들에게 쉬운 일이었으며 오히려 [[경평군]]을 통해 [[청나라|중국]]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이후 [[경평군]]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유배된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렸는지 "[[조선|이 나라]]가 [[전주 이씨|이씨]]의 나라인가 [[신 안동 김씨|김씨]]의 나라인가" 라는 발언을 했다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철종은 처음에는 작호만 박탈하자고 했지만 결국 [[안동 김씨]] 세도의 압박을 견딜수가 없어 유배보내야 했다. 출처: '''《[[철종실록]]》 12권, 철종 11년([[1860년]], 청 함풍(咸豊) 10년) 11월 12일 (신묘)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111002_002|#]]][* 한편 [[왕족]]을 연행사로 임명한 것은 철종뿐만이 아니었고, [[숙종(조선)|숙종]] 역시 [[삼번의 난]]을 전후한 시기에 왕족들을 파견한 사실이 확인된다.] == 개혁 시도 == 상기한 바와 같이 철종은 [[강화도]]에서 살았던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임술민란]]의 수습을 위해, 《삼정이정청》이라는 개혁 기관을 설치하며 세도가의 횡포와 삼정 문란을 저지하려 했다.[* 출처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1862년]], 청 동치(同治) 원년) 6월 10일 (신유) 2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306010_002|#]].] 이 과정에서 철종이 직접 [[창덕궁 인정전]]에서 직접 관리와 유생들의 상소문을 받기도 했고[* 출처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1862년]], 청 동치(同治) 원년) 6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306012_001|#]].], 이를 바탕으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799|《삼정이정절목》]]'''이라는 개혁안을 만들기도 했으나, 3개월만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신 안동 김씨|세도가]]의 반발과 압박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한 채[* 사실 폐지할 때 쯤에는 [[삼정의 문란]] 저지를 위한 삼정이정청이 정작 세도가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는 등 문제가 심했다.] 삼정이정청을 폐지하게 된다. 결국 철종은 현실의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개혁의지도 충분했으나, 기본적으로 바로 그 문제의 근원인 [[신 안동 김씨|세도가]]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꼭두각시]] [[조선/왕사|임금]]이고 [[조선/왕사|정통성]]이 매우 취약한만큼 [[왕권]]이 약하며,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세력이 너무 부족했다. == 요절 == 나중에 가면 철종은 자신이 어디까지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력들의 [[꼭두각시]] [[조선/왕사|왕]]으로 실권이 없어 스스로 왕다운 왕이 아니라는 허탈감[* 단, 사면 문제에 한해서는 신하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시켰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1840년]], 헌종 6년 [[사망]])을 대간 + 대신이 반대했음에도 사면시켰고, [[정조(조선)|정조]] 대에 [[대리청정]]을 반대하다가 죽은 [[홍인한]] 역시 처음에는 신하들이 반대하자 물러났다가 [[1858년]](철종 9년), [[원자(왕족)|원자]]가 탄생하자 이 분위기에 편승해 사면했는데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철종 초반기에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죽인 조병현도 [[1853년]](철종 4년)에 사면시켰다. 이때도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반대하지 않았다.]과 복잡한 궁중 예법에 질려버렸고, 국정에 대한 의욕까지 잃어버려 [[성욕|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운다.[* 비슷한 테크를 탄 왕으로 [[신라]] [[효공왕]]이 있었다. 궁 밖에서 자라다 소환되어 [[왕]]이 되었지만 권력을 상실한 꼭두각시 신세와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국가는 이미 파멸해가고 있었기에 절망한 나머지 여흥에 빠졌다. 하지만 [[효공왕]]은 철종보다 더 비참한데 이로 인해 그의 [[후궁]]들이 신하에게 살해되는 수모를 겪어도 처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신이 살해될까봐 두려워하는 처지였다. 철종은 그래도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도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는 말을 곱게 따라주기라도 했다.][* 또한, 철종의 경우, 뇌물 문제 등에 대해서 직접 문제를 꺼내는 등 신하들한테 눈칫밥 먹이면서 제지할 정도는 됐으니 [[효공왕]] 등 완전히 꼭두각시 신세였던 왕들보다는 사정이 그나마 좋았다.] 그러다보니 농사로 다진 체력이 급속히 무너져버렸고 재위 말기부터는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 특히 [[1861년]](철종 12년)부터 앓아눕기 시작해 정무도 겨우 결재할 정도였다.] 결국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 8일, 33세라는 한창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처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8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412008_008|#]].][* 전임 왕 [[헌종(조선)|헌종]]이 워낙 단명해서 그렇지 철종도 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조선/왕사|임금]]이다.][* 확실히 철종이 단명할 일생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철종 바로 위인 서자 형인 영평군 [[이경응]]은 무려 소갈증(당뇨)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73세'''의 꽤 장수한 나이로 [[사망]]했는데, 동생 철종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도 구한말의 상당기간동안 살아있던 셈이다. 철종의 직업(?)이 [[조선/왕사|왕]]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정도는 무리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왕들과 비슷한 환경이었다면 50대는 찍고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에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는 혼란에 빠졌으며, 모두 [[조선/왕사|후계 문제]]에만 정신이 팔려 [[철종(조선)|왕]]의 [[죽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철종은 [[철인왕후|중전]]과 여러 [[후궁]]들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어릴 적에 죽었고, 철종 [[죽음|승하]] 당시에는 후궁 [[숙의 범씨]]에게서 낳은 [[영혜옹주]]만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영혜옹주]]마저 훗날 개화파의 거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박영효]]와 혼인했지만, 혼인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14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출처 :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1872년]], 조선 개국(開國) 481년) 7월 4일 (병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0907004_001|#]].] 결국 철종의 [[사망]]을 끝으로 [[효종(조선)|효종]]부터 내려 오는 [[조선]]의 모든 '''[[직계]] [[조선/왕사|왕통]](直係王統)'''은 단절됐다. 그래서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차남 명복을 [[효명세자|익종 대왕]]의 아들로 입적시켜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는데, 그가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이다. 사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철종과는 혈통상 남과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인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촌수로 '''무려 17촌'''[* 철종은 [[인조]]의 차남인 [[효종(조선)|효종]]의 7대손, 고종은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의 8대손이다.]이다. 최초로 '방계 승통'한 [[선조(조선)|선조]]가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로 불안했지만[*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도 선왕이었던 [[명종(조선)|명종]]과 3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흥인군]], [[흥선군]]계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왕위 계승을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으로 올라가서 계승자를 찾아야 하거나 철종인 원범의 서형인 경응의 아들들로 해야 했는데 문제는 경응은 아들이 없었고 결국 뒷날 [[고종(대한제국)|고종]] 대에 가서 양자를 들이게 된다. 그리고 [[효종(조선)|효종]]의 직계후손들은 이미 단절된 상황에서[* 익평군의 아들 이재성이 있긴 했으나 서자였고 나이가 고작 4살이었다]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들로 가야하는데 그나마 가깝다해도 멀긴 하다. 그나마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이면서 그래도 양자로 [[은신군]]의 아들로 들어온 [[남연군]]의 후손들이 그나마 제일 나았다.] 앞에 선조의 예도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는 더 심해졌다. [[효종(조선)|효종]]은 적자임에도 동복형제이자 장자인 [[소현세자]]가 있는 둘째여서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이를 [[송시열]]과 [[송준길]]을 위시한 산당에게 인정받고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보냈으며, [[죽음|승하]] 이후에는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종은 [[대한제국]] 개창 이전에 [[죽음|승하]]한 마지막 [[조선]] [[조선/왕사|임금]]이어서 그런지 마지막 타이틀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먼저 전통적 방식대로 실록청에서 정식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실록|철종의 실록]]이 마지막이다. 그 뒤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경술국치]] 후에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편찬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철종실록]]》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은 편에 속하는데,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죄다 빼버려서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철종 12년([[1861년]]) 3월 27일 ~ 4월 23일의 기사는 2쪽 분량일 정도이다. 이어지는 5월 한달치 기사는 1쪽도 안 된다. 사실 《[[철종실록]]》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기의 실록인 [[순조실록]]과 [[헌종실록]]도 이전까지(태조~정조)의 실록에 비해 기록이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여러 신하들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했던 [[승정원일기]]가 완역될 필요가 있다. 또한 [[청나라|중국]]의 [[황제]]로부터 [[시호]]를 추증받은 마지막 [[조선]]의 [[조선/왕사|왕]]이기도 하다. 철종이 [[청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는 '충경(忠敬)'인데, 공교롭게도 수백 년 전 [[고려]]의 [[원종(고려)|원종]]이 [[원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와 같다. 그리고 [[조선왕조]] [[조선/왕사|역대 임금]]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에 [[죽음|승하]]한 [[조선/왕사|임금]]이자 [[조선왕조]] 존속기간 중 마지막으로 [[장례|국상]](國喪)을 치른 [[조선/왕사|임금]]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__예릉(睿陵)__'''으로 중전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조선왕조실록]]》, [[청나라|중국]] 측으로부터 받은 [[시호]]와 마찬가지로 철종의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 왕릉]] 형태로 조성한 마지막 왕릉이다. [각주] [[분류:인물별/생애]][[분류:철종(조선)]]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철종(조선), version=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