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철인왕후(드라마)]][[분류:드라마 설정]]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철인왕후(드라마))] [include(틀:철인왕후(드라마))] [목차] == 개요 == [[tvN]] [[주말 드라마#s-3.2.2.4|토일 드라마]]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의 극중 설정을 다루는 문서. == 내용 == === 시간적 배경 === || {{{+2 '''[[1851년|{{{#0E0F23,#BBBBBB 1851년}}}]] 6월 ~ 12월'''}}}[br]{{{-1 ([[함풍제|{{{#0E0F23,#BBBBBB 함풍}}}]] 2년 / 咸豊 二年)}}}[*오류 극중 15화, 16화의 조회 중 나오는 교지에 '함풍 2년'으로 나온다. 다만 실제 역사에 근거하여 보면 '함풍 원년(咸豊 元年)'이어야 맞다. 한편 이는 대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대]]의 예에 따라 [[청나라|청]]의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우리 내부 기록의 '철종 재위 2년(哲宗 在位 二年)'과 같다. {{{-1 (함풍 원년 = 철종 재위 2년)}}}] || ||● 5화에서 [[김병인]]을 판의금부사에 임명할 때 나온 교지에 '10월 4일'로 표기된다.[br]● 15화에서 늦가을 풍경 즈음 되었을 때 좌의정 민우진[* 숙의 민자현의 아버지]을 임명한 교지에 '11월 12일'로 표기된다. 그리고 16화(다음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면서 판총재관에 [[이욱(철인왕후)|영평군 이경응]]을 임명하는데, 그 교지에 '11월 13일'로 나온다.[br]● 촬영시기와 극중 시기가 엇비슷하게 흘러가는 걸로 봤을 때 극중 배경은 '1851년 6월부터 12월'까지이다. 다만 극중 본격적으로 [[이원범(철인왕후)|철종]]과 안송 김씨, 풍안 조씨 사이의 다툼이 벌어지는 건 '10월부터 12월까지'이며, 이 드라마는 그 시기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 === 공간적 배경 === ||<-3> {{{+2 '''[[조선|{{{#0E0F23,#BBBBBB 조선}}}]]'''}}} || ||<-3> {{{+1 [[한양|{{{#FFFFFF,#BBBBBB 한성부}}}]]}}} || ||<|8> [[서울 한양도성|{{{#FFFFFF,#BBBBBB 한양도성[br]{{{-1 (漢陽都城)}}}}}}]] || [[의금부|의금부[br]{{{-1 (義禁府)}}}]] ||사법기관. 판의금부사 [[김병인]]. || || [[훈련도감|훈련도감[br]{{{-1 (訓鍊都監)}}}]] ||정규군. 대장(大將) [[김좌근(철인왕후)|김좌근]]. || || [[금위영|금위영[br]{{{-1 (禁衛營)}}}]] ||정규군. 대장(大將) [[이욱(철인왕후)|영평군 이경응]]. || || [[어영청|어영청[br]{{{-1 (御營廳)}}}]] ||정규군. 무예별감 [[홍 별감(철인왕후)|홍두일]]이 무예교련관으로 근무 중이다. || || [[김문근(철인왕후)|김문근]]의 사저 ||[[김소용]]의 본가.[br]{{{-1 ● 우물: 8년 전 어린 [[김소용]]과 어린 [[이원범(철인왕후)|이원범]]이 함께 숨었던 곳.[br]● 정자: [[이원범(철인왕후)|철종]]과 [[김병인]]이 주량 대결을 펼치는 곳.}}} || || [[김좌근(철인왕후)|김좌근]]의 사저 ||[[김병인]]의 본가. || || 만물상 ||[[최 상궁(철인왕후)|최 상궁]]이 요술경을 구입한 곳. || || 옥타정[br]{{{-1 (玉打亭)}}} ||[[김소용]]이 이생망으로서 들른 기생집.[* 2회에서 [[김환(철인왕후)|김환]]의 설명에 따르면 '기생들의 목소리가 옥구슬을 치는 것 같다'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7> [[창덕궁|{{{#FFFFFF,#BBBBBB 창덕궁[br]{{{-1 (昌德宮)}}}}}}]] || [[창덕궁 희정당|희정전[br]{{{-1 (熙政殿)}}}]] ||편전(便殿). [[이원범(철인왕후)|철종]]의 처소. || || [[창덕궁 대조전|대조전[br]{{{-1 (大造殿)}}}]] ||[[김소용]]의 처소. || || [[창덕궁 선정전|선정전[br]{{{-1 (宣政殿)}}}]] ||편전(便殿). [[이원범(철인왕후)|철종]]의 집무공간. || || [[창덕궁 인정전|인정전[br]{{{-1 (仁政殿)}}}]] ||정전(正殿). 조회가 열리는 곳. || || [[창덕궁 선원전|선원전[br]{{{-1 (璿源殿)}}}]] ||역대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신정왕후(철인왕후)|신정왕후]]의 아지트. || || 수랏간 ||[[만복(철인왕후)|만복]]의 직장 겸 숙소. [[김소용|소용이]]의 아지트. || || 사복시[br]{{{-1 (司僕寺)}}} ||[[김소용]]이 만든 궁중 배달전문 서비스 '배달의 후예'[* 소용이가 아이디어를 낸 '식가마'를 주 배달도구로 이용한다. 라이더는 '식가마꾼'으로 불린다.]의 본거지. || ||<|2> [[창경궁|{{{#FFFFFF,#BBBBBB 창경궁[br]{{{-1 (昌慶宮)}}}}}}]] || [[창경궁 통명전|통명전[br]{{{-1 (通明殿)}}}]] ||[[순원왕후(철인왕후)|순원왕후]]와 [[신정왕후(철인왕후)|신정왕후]]의 처소.[* 순원왕후와 신정왕후가 각각 역모사건과 중전에 대한 음해사건으로 서궁으로 유폐된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서궁(西宮)'은 [[덕수궁|경운궁(慶運宮)]]이다.] || || [[창경궁 춘당지|춘당지[br]{{{-1 (春塘池)}}}]] ||[[김소용]]이 뛰어든 연못. "괜히 왔다 간다 - --장봉환--"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촬영지였던 [[부여군|부여]] [[궁남지]]에 있던 것으로, 촬영 이후 해당 소품은 치워졌다.][br]{{{-1 ● 와룡정(臥龍亭)[* 창경궁에는 이런 정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촬영지는 [[부여군|부여]] [[궁남지]]의 포룡정(抱龍亭).]: 춘당지에 있는 정자. [[김소용]]이 뛰어든 연못 바로 앞이다.[br]● 만월정(滿月亭)[* 마찬가지로 창경궁에는 이런 정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촬영지는 [[남원시|남원]] [[광한루원]]의 완월정(玩月亭).]: 춘당지에 있는 정자. [[장봉환]]이 깃든 [[김소용]]이 [[이원범(철인왕후)|철종]]을 처음 만난 곳.}}} || ||<-3> {{{+1 [[경기도|{{{#FFFFFF,#BBBBBB 경기도 남부}}}]]}}} || ||<-3> {{{+1 [[충청도|{{{#FFFFFF,#BBBBBB 충청도}}}]] [[목천읍|{{{#FFFFFF,#BBBBBB 목천현}}}]]}}} || === 실제 역사와 다른 설정 === 이 드라마에서 설정된 내용과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은 아래와 같다. * {{{#red '''이 드라마'''}}}에서 [[김소용]] 기준으로 [[순원왕후(철인왕후)|순원왕후 김씨]](대왕대비)가 '''시할머니''', [[신정왕후(철인왕후)|신정왕후 조씨]](왕대비)가 '''시어머니'''로 설정되어 있으나, {{{#blue '''실제 역사'''}}}에서 [[철인왕후]] 기준으로 [[순원왕후]](대왕대비)는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왕대비)는 '''손윗동서'''이다. 철인왕후의 남편인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 {{{#red '''이 드라마'''}}}에서 [[김소용]]의 어머니는 소용이를 낳자 마자 사망한 걸로 설정되어 있으나, {{{#blue '''실제 역사'''}}}에서 [[철인왕후]]의 어머니 '흥양부부인 민씨'는 철인왕후가 중전으로 책봉되고 나서도 66세까지 살았다. [[https://blog.daum.net/mbk9198/15544305|#]] * {{{#red '''이 드라마'''}}}에서는 [[헌종(조선)|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등장하지 않는다. '안송 김씨와 풍안 조씨의 대립 구도'에 넣기 힘들어서 배제한 걸로 보인다. 효정왕후 본인은 김씨도 조씨도 아닌 [[남양 홍씨]]이다. {{{#blue '''실제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난 이후인 [[1904년]]까지 살았다. * {{{#red '''이 드라마'''}}}에서는 철종이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반강제로 거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연히 이는 실제 역사와 다르다. {{{#blue '''실제 역사'''}}}에서는 1852년 1월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것은 맞으나, 스스로 그만두었다. * {{{#red '''이 드라마'''}}}에서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그만둘 즈음인 1851년~1852년 시점에 세도 정치로 인해 삼정 문란이 심한 것으로 나와 있고, 이로 인한 민란이 진행 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정도까지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실제 삼정이정청이나 동비와 같은 실제 역사학에서 접할 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용어들에 대해서 대중이 크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지적할 만한 오류는 다음과 같다. * 1851년 10월에 황해도 문화·은율 일대에서 민란이 발생한 것은 맞으나, {{{#blue '''실제 역사'''}}}에서 이 민란에 대해 철종이 개인적으로 삼정 문란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210005_003|관련 내용]] (제작진이 이 민란을 참고했는지는 불명.) * 이 민란을 바로잡기 위해 철종이 친정하자마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영평군(1828)|영평군]]을 세운 것으로 나오는데 {{{#blue '''실제 역사'''}}}에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는 것은 철종 13년인 1862년, 즉 10여년 뒤의 일이고, 당연히 책임자는 영평군이 아니며, 순원왕후는 이미 그 이전인 1857년에 사망하였다. * 이 민란을 일으킨 이들을 '동비(東匪)', 즉 동학교도라고 칭하고 있는데, {{{#blue '''실제 역사'''}}}에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하였고, 1851년~1852년 시점에서는 최제우는 전국 각지를 떠돌며 장사 중이었다. 게다가 조정 차원에서 동학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인식한 것은 1863년으로 이미 고종이 즉위한 직후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012020_006|관련 내용]] 게다가 동학의 목소리가 커진 시점은 1차 교조 신원운동이 발생한 1871년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 * {{{#blue '''실제 역사'''}}}에서의 삼정이정청은 1862년 5월에 진주민란이 발생한 뒤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에 의해 원인이 삼정의 문란이라고 판단하자 조정에서 민란 수습을 위해 만든 임시 관청이다. 삼정을 바로잡고 세도정치에 대해서 견제효과까지도 기대한 삼정이정청은 오히려 이 삼정이정청의 상당수 관리가 세도정치를 주도한 세력이 관장하여 실효적인 커다란 효과를 거두긴 힘들었고, 약 3개월 뒤인 8월에 삼정이정청이 철폐된 후에 이 삼정을 관리하는 업무는 실제로도 그러하고 이 드라마에서도 세도정치 권력의 핵심이라고 표현된 비변사가 홀라당 가져가버린다. * {{{#red '''이 드라마'''}}}에서는 철종이 영평군을 삼정이정청 판총재관으로 임명할 때 교지에 영평군의 이름을 '이경응'으로 적었다. 이후 19화에서도 영평군은 '이경응'으로 불렸다. {{{#blue '''실제 역사'''}}}에서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8년 3월에 이경응으로 개명했다.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 >"선파(璿派)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로 닦는 것은 한 뿌리에서 천 개 가지로 나누어지고 만 갈래가 근원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역대 조상들의 영혼도 반드시 굽어보고 기뻐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조선)|선조(宣祖)]] 이후의 여러 계파가 [[덕흥대원군|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시조로 삼아 10여 파로 나뉘어졌는데, 모두 한 조상의 같은 핏줄이다. [[항렬]]이 각 파가 같지 않은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족(九族)을 친애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난다. '''‘응(應)’ 자 이하를 반드시 한 가지로 정하여 설사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벼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름을 고치도록 하는 일로 [[종친부|종친부(宗親府)]]와 [[이조(조선)|이조(吏曹)]]에 분부하라.'''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이 예에 따라 고쳐 정하는 것이 실로 또한 각 집안에서 돈독하게 하는 방도이니, 함께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 >하였다. >----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1868년) 3월 2일 경술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3002_001|#]]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철인왕후(드라마)/고증, version=405, paragraph=2)] === 바뀐 역사 === >'''제25대 {{{+1 {{{#red 철조실록}}}}}}''' >1. 강화도령 [[이원범(철인왕후)|이원범]] {{{-1 {{{#orange 475}}}}}} >2. 세도정권 아래 이뤄진 철조의 친정 {{{-1 {{{#orange 479}}}}}} >3. 60년간 지속된 안송 김씨의 세도정권 {{{-1 {{{#orange 480}}}}}} >4. 철조의 가족 {{{-1 {{{#orange 482}}}}}} > {{{-1 [[김소용|철인왕후 김씨]]}}} >5.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1 {{{#orange ''페이지 미상''}}}}}} >{{{#green (중략)}}}[* 6.부터 8.까지는 화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 {{{-1 조선의 승리}}}[* 8.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인데 '조선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추론컨대, 외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이며 대한제국이 탄생했다는 것을 보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칭제건원과 배상금을 통한 근대화를 준비를 한듯 하다. 대체역사물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 >9. 입헌군주제 대한제국의 탄생 {{{-1 {{{#orange 512}}}}}} > >'''제26대 {{{+1 {{{#red 고종실록}}}}}}'''[* 가족관계가 [[흥선대원군]]을 제외하면 실제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동일하다. [[김소용]]의 자녀가 즉위했을 지 우리가 알던 고종이 즉위했을 지는 시청자들의 상상에 맡긴 결말이다.] >1.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가족 {{{-1 {{{#orange 514}}}}}} > {{{-1 [[명성황후|명성황후 민씨]][* 드라마에서는 명성왕후라고 나오는데, 명성왕후는 현종의 왕비이며 200년전 사람이다. 드라마에서 잘못 표기한 것이다. ] | [[영친왕|영왕 이은]] | [[의친왕|의왕 이강]]}}} >2. 왕권과 의회 {{{-1 {{{#orange 512}}}}}}[* 극중 '512페이지'로 표기되어 나온다. 이는 오기이다. 왕권이라는 소제목도 황권으로 표기되어야 맞는 표기.] > {{{-1 홍인권 내각[* 숙의 홍씨(홍심향)의 집안인 [[남양 홍씨]] 가문 사람이거나 [[홍 별감(철인왕후)|홍 별감]] 가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 권력 분립}}} >{{{#green (후략)}}}[* [[장봉환]]의 손에 가려져서 내용이 보이질 않는다.] >---- >- 20화에 등장한 《[[조선왕조실록]]》의 목차 中 >'''제25대 {{{+2 철조실록}}}''' >---- >조선의 제25대 왕 [[이원범(철인왕후)|철조]](1831~1863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로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49년 7월 28일(음력 6월 9일)~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 14년 6개월간 재위)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OO에 어둡고 외척인 안송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김소용|철인왕후]]의 활약으로 국정이 안정되었다. 이후 철조는 민심을 얻은 성군으로 평가받았다. >---- >- 20화에 등장한 《[[조선왕조실록]]》의 '철조실록' 편의 책갈피 소개문 中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원범(철인왕후), version=161, paragraph=2.3.3)] >'''내명부 규칙''' >---- >십팔세 이상 내명부 여인들의 혼인을 허한다 >십세이하의 나인들을 내명부에 들이는 것을 금한다 >---- >- 20화에서 김소용이 새로 만든 내명부 규칙 : 최상궁이 대필 === 여담 === * [[장봉환]]이 [[김소용]]에 빙의된 이후에도 궁에서 글을 읽거나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장봉환]]의 부모가 한문, 국사 선생님이라 한문 교육을 받았기 때문. * [[김소용]]이 현대인들이 쓰는 외래어나 외국어 속어 등을 마구 쓰는데, 당시 [[서학]]을 금했던 분위기 상 실제 역사에서는 있기 힘든 이야기다. 극에서는 [[동학]]만 불순한 사상으로 직접적으로 나오지만, [[서학]](천주교) 역시 한 가문을 몰락시킬 정치적인 도구로 쓰였다. 대령숙수가 중간에 [[기해박해]] 이야기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양인(서양인)'''의 말을 쓰면 오해를 살 소지가 크다. 따라서 소용의 말들은 어디까지나 코미디 사극이라 가능한 이야기. * 서양식 요리 역시 어디까지나 [[장봉환]]이 청와대 수석쉐프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장치이고, 이 역시 오해를 사기 좋은 행동이다. [* 극중에서도 대왕대비가 요리의 비결을 묻자 프랑스 요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영감이 떠올랐다고 답변하는데, 서구에 대한 경계가 강한 것을 의식해서 한 표현이다.] 그리고 [[중전]]이 수랏간에 들어가 요리하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판타지여서 가능한 설정. * 장봉환의 영혼이 깃든 후 소용이 철종에게 반말, 욕설, 폭력(코를 감싼 손을 치거나 비녀를 창문에 꽂거나 하는 모습) 등을 보이는데, 실제로 그랬다가는 '''폐비'''크리를 맞기 딱 좋은 행동들이다. 물론, 왕과 왕비가 싸운 역사야 많지만, 극중의 행동은 엄청난 도를 넘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