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img.newdaily.co.kr/art_1321319632.jpg]] [목차] == 개요 == [[斥]][[和]][[碑]] [[조선]]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문호 개방에 부정적이었던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 양인([[洋]][[人]])과의 교류 및 접촉을 배제하고, 서양의 침범에 대비하여 싸우지 아니함은 [[매국|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세웠던 석비([[石]][[碑]]). == 역사 ==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1년에 처음 건립했는데 비문은 아래와 같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작은 글자로 왼쪽, 또는 뒷면에 이런 내용을 병기했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 >우리 자손 만대에 훈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원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 대원군]]의 명령하에 처음 만들었는데, 1871년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더 이상은 서양 오랑캐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과 위정척사파 및 유림들의 확고한 입장을 드러내었다.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웠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1882년 [[청나라]]로 납치되어 정치에서 실각하고,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여 실권을 잡은 뒤 문호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라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현황 == 똑같은 척화비를 여러 기 만들어 세웠지만, 상당수는 통상 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이 끝난 뒤에 의미를 잃어 폐기 처분되거나 방치, 훼손되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만들었다 보니 지금도 전국 각지에 여럿 남아 있다. === 현재 남아 있는 곳 === * [[서울특별시]] [[운현궁]] : 전시용으로 만든 비석이 따로 있다. * [[서울특별시]] [[절두산 성지]] * [[충청북도]] [[청주시]] *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관내 * [[부산광역시]] [[용암초등학교(부산)|용암초등학교]] 교내 * [[대구광역시]] [[원화여자고등학교]] 교내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여자고등학교]] 교내 : 본래 성주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으나 성주여고로 옮겼다. * [[경상남도]] [[양산시]] * [[경상남도]] [[창녕군]] 만옥정공원 :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건 아니고, 이 만옥정공원은 창녕군 이곳저곳의 문화재를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에 [[창녕 진흥왕 척경비]], 창녕 [[객사]],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 역대 창녕군수 선정비, [[6.25 전쟁]] 창녕지구 전승비 등이 모여있는 일종의 작은 야외 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척화비 30여 개가 남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분류:조선(19세기)]][[분류:조선의 금석문]][[분류:흥선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