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채희각}}}'''[br]'''蔡熙覺[*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0&evntId=0034987180&evntdowngbn=Y&indpnId=000001851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9년 5월 17일 판결문]]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1753&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19년 5월 17일 집행원부]]에는 蔡'''{{{+1 凞}}}'''覺으로 기재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채희각.png|width=100%]]}}} || ||<-2>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 '''자 / 호''' ||성민(聖民) / 괴당(槐堂) || || '''본관''' ||[[채(성씨)|인천 채씨]][*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전헌공파(兩傳軒公派) 28세 희(熙) 항렬.] || ||<|2> '''출생''' ||[[1894년]] [[8월 2일]] || ||[[경상도]] [[대구광역시|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공산동|미대동]][*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채(성씨)|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학기]]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 234번지) || || '''사망''' ||[[1967년]] [[10월 6일]][* 인천채씨대동보 3권 302쪽에는 1944년 2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인천채씨족보 3권 58쪽에는 1964년 2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년 73세)|| ||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공산동|미대동]]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채송대]]는 친동생[* 채송대가 이후 첫째 숙부 채효식(蔡孝植, 1879. 7. 14 ~ 1959. 1. 1)에 입양되면서 족보상으로는 사촌 동생이 되었다.]이며, [[홍연흠]]은 그의 고모부이다. == 생애 == 1894년 8월 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 1873 ~ 1903. 12. 19)과 어머니 [[성주 도씨]](? ~ ?. 6. 20)[* 도응호(都應浩)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희각은 1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채갑원]]을 비롯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30301.010350826160001|#]]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학기]]와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죄],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50&evntId=0034987180&evntdowngbn=Y&indpnId=000001851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안양교도소|경성감옥]]·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해 12월 11일 [[http://db.history.go.kr/id/ia_5367_4156|가출옥한 뒤]]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7년 10월 6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인천 채씨]][[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894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