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덕궁 인정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정문)]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812호 ||<|2> ← || '''813호''' ||<|2> → || 814호 || || [[경복궁 근정문|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 '''창덕궁 인정문''' || [[창덕궁 선정전]]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3호}}}]]''' || ||<-2> {{{#fff {{{+1 '''창덕궁 인정문'''}}}[br]{{{-1 昌德宮 仁政門}}}}}}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인정문,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745년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인정문_전경.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정문과_구름.jpg|width=100%]]}}}|| || {{{#gold '''인정문[*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57&ccbaKdcd=12&ccbaAsno=0813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84&ccbaKdcd=12&ccbaAsno=0813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인정문_야경.jpg|width=100%]]}}}|| || {{{#gold '''인정문 야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55&ccbaKdcd=12&ccbaAsno=0813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의 [[정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어 [[창덕궁 금천교|금천교]]를 건넌 뒤 [[창덕궁 진선문|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보인다. 이는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서 [[경복궁 근정문|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인정전의 문’이다. ‘인정(仁政)’ 자체는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현판]]의 [[글씨]]는 [[선조(조선)|선조]] 시대의 명필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龍)이 쓴 것으로 전한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은대계회도2.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에 묘사된 인정문 일곽.png|width=100%]]}}} || || {{{#gold '''16세기 조선 전기 창덕궁 인정전 일곽의 모습이 담긴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 {{{#gold '''19세기 〈동궐도〉에서 묘사해놓은 인정문 권역'''}}} ||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을 두었으며 문과 십자각 모두 중층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다른 [[건물]]들이 다 불탔을 때도 무사했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년) 10월에 가까이 있던 [[승정원]] 건물에서 불이 나 [[화재]]를 입어 이듬해인 1745년(영조 21년) 3월에 재건했다. 당시 재건을 책임졌던 [[당상관]] 김약로가 상량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058|上樑文.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을 만들지 말지 고민했는데 영조가 정전이 아니라며 굳이 만들지 말라 명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011008_003|#]] 1907년([[융희]] 원년) [[순종황제]]가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살았다. 그때 인정전 권역을 많이 변형했고 인정문 모습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8.15 광복|광복]] 이후인 1994년 원형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 [[처마|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제일 아랫 부분에는 [[암석|장대석]]으로 [[기단]]과 [[계단]]을 조성했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앞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을 놓았으나 [[답도]]는 설치하지 않았다. * 기단 위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올려 건물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기둥을 연결해주는 창방과 평방[*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을 놓아 [[공포(동음이의어)#s-2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공포|다포]] 양식으로 만들었고 기둥 사이마다 공포(주간포)를 두었는데 어칸에는 3개,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다. * 도리받침부재는 구름 모양으로 깎았으며,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만들어 서까래 등 [[가구]]가 보이게 했다. *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칠했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만들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 인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10칸의 [[복도|행각]]이 있고,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창덕궁 인정전|인정전]] 좌우의 행각과 바로 붙어있다. 원래 서쪽의 월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동쪽 행랑에는 관광청과 육선루, 악기고 등이 있는 등 여러 관청들이 입주해 있었는데 현재는 향실을 제외한 전 행랑이 빈 공간이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392|#]]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정문 마당.png|width=100%]]}}} || || {{{#gold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 마당'''}}} || 앞 마당이 찌그러져있다.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그랬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고 또 남쪽에 [[종묘]]가 있어서,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간]]을 최대한 넓게 하려다보니 저런 모양이 나온 것. 이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태종(조선)|태종]]은 이 마당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측량을 [[농땡이|게을리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옥]]에 가두고 행각을 부수게 한 뒤 그 곳에 [[담]]만 쌓았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사면]]받은 박자청은 이후로도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공사]]를 계속 맡았고 행각도 원래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다시 만들었다. 즉, 이 찌그러진 마당은 '''박자청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가 의도했던 설계인 것. ''' --천하의 태종과 맞서서 자기 뜻을 이루다니 이 양반도 보통 양반이 아닌 듯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02년 창덕궁 인정문.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인정전(일제강점기).jpg|width=100%]]}}} || || {{{#gold '''1902년 촬영한 인정문'''}}} || {{{#gold '''일제강점기 인정문과 인정전 일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강점기 변한 인정문 서행각.png|width=100%]]}}} ||<#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강점기 인정문 내측.png|width=100%]]}}} || || {{{#gold '''변형된 인정문 서행각'''}}} || {{{#gold '''일제강점기 인정전 마당 안쪽에서 바라본 인정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0년대 인정문.png|width=100%]]}}} ||<#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복원 중 인정전.jpg|width=100%]]}}} || || {{{#gold '''1980년대 인정문'''}}} || {{{#gold '''1990년대 복원 중인 인정문'''}}} || 위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순종(대한제국)|순종]] [[이사|이어]] 이후에 달라진 부분이 많았다. 본래 [[정전]]이던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이 [[황제]]의 알현소로 바뀌면서 인정문 역시 단순한 [[정문]]에서 알현소의 [[현관]]이 되었고 이 때 몸체가 많이 변했다.[br][br]우선 정면 3칸 중 앞 면의 가운데 칸과 뒷면의 좌, 우 협칸만 통행할 수 있게 한 뒤, 나머지 칸은 전부 [[창문|유리창]]과 [[벽]]으로 막았다. 그리고 문짝도 [[근대화|근대식]] 나무 문으로 조성했으며 [[현판]]도 떼어냈다.[* 북쪽의 중앙 칸은 나중에 통행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현판도 나중에 다시 걸었다.] 또한 원래 인정문과 인정전은 별개의 건물이었으나, 인정전 좌, 우에 [[건물]]과 바로 이어지는 [[복도|행각]]을 덧댄 뒤 그 행각을 인정문 행각과 연결되게 하여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 실내 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정문 행랑은, 원래 바깥 쪽만 [[벽]]과 [[문]]으로 나누고 인정전 마당 쪽으로는 [[기둥]]만 놓았던 것을 개조 이후엔 전부 [[벽]]으로 막은 뒤 귀빈 대기실 등으로 활용했다. [[1990년대]] [[조선시대]]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볼 수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정문 용마루.png|width=100%]]}}} || || {{{#gold ''' 인정문 용마루[*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 || 다른 [[궁궐]] 건물의 [[문]]들과는 다르게, 용마루에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박혀있다.[* 이는 인정전도 마찬가지. 단 인정문에는 앞 뒤로 3개, 총 6개가 박혀있고 인정전에는 5개가 박혀있다.] 바로 [[대한제국]] [[나라문장|국장]] 및 [[황실]]의 [[문장]]이었던 '[[이화문|이화문(李花紋)]]'이다.[* [[배(과일)|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는 배꽃(梨花)이다.]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실]]이 [[전주 이씨]]라 오얏꽃을 문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가문 문장을 새겨넣는 것은 개화기 서양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가몬(일본)]]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크게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이어했을 당시에 박았다는 주장과 [[일제강점기]] 이후에 박았다는 의견이 있다. 전자는 이미 구한말에 궁에 유리창과 커튼, 카페트를 들이는 등 다방면에서 외국식을 도입했던 것을 들 수 있고, 후자 [[일본 제국|일제]] 설은 [[일본]]이 [[반달리즘|전통 양식 파괴]]를 위해 일부러 용마루에 박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와전되어 꽃 종류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쿠라]]를 박았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 오얏꽃 문양은 [[1990년대]] 인정전 일곽의 [[오리지널|원형]] [[복원]] 당시에도 떼지 않았고 지금까지 있다. == 여담 == * [[조선]] [[왕]]들의 [[대관식|즉위식]]을 이 곳에서 많이 열었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장례기간]]에 즉위식을 하기에, 분위기가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펐기 때문이다.[[https://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06|#]] 10대 [[연산군]]을 시작으로 17대 [[효종(조선)|효종]], 18대 [[현종(조선)|현종]], 19대 [[숙종(조선)|숙종]], 21대 [[영조]], 23대 [[순조]], 25대 [[철종(조선)|철종]], 26대 [[고종(대한제국)|고종]]까지 임금 8명이 이 곳에서 [[옥좌|왕위]]에 올랐다. * 이 곳에서 [[임금]]이 직접 [[죄인]]을 국문하는 친국을 많이 열었다.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장소]]가 달라졌는데 꽤 무거운 [[죄]]를 저지른 중죄인들을 주로 인정문에서 심문했다. 즉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사실상 살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3009_002|#]][[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5009_001|#]] --[[사망 플래그]]--[* [[경희궁]]에 [[왕]]이 머물 땐, [[경희궁 숭정문|숭정문]]에서 했다.] * [[성종(조선)|성종]] 시기 [[문과]]의 초시[* [[과거제도|과거]]의 첫 시험.]와 중시[*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관|문]], [[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는 [[과거제도|과거]].]를 동시에 치를 때,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에서 함께 보면 [[컨닝|부정행위]]가 있을 것을 염려해 인정전 마당에선 중시를, 인정문 마당에선 초시를 치르게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2005_002|#]] --예나 지금이나 다를 거 없다.-- * [[MBC]] 예능 《[[무한도전]] - [[관상 특집]]》을 인정문을 본딴 부안영상테마파크의 세트에서 촬영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version=466), title2=창덕궁 인정전, version2=66), title3=박자청, version3=17)] [[분류:창덕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