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대보단'''}}}[br]{{{-1 昌德宮 大報壇}}}}}}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신선원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br]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704년]] {{{-1 (창건)}}}[br] [[1921년]] {{{-1 (철훼)}}} || ||<-2> {{{#ffd700 '''이명'''}}} || 황단(皇壇) || ||<-2> {{{#ffd700 '''건립 발의자'''}}} || 민진후(閔鎭厚) || ||<-2> {{{#ffd700 '''공사 감독'''}}} || 김시택(金時澤) || ||<-2> {{{#ffd700 '''제사'''}}} || [[홍무제]][br][[만력제]][br][[숭정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대보단.png|width=100%]]}}}|| || {{{#gold '''대보단'''}}}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에 있던 제단. [[조선]]에서 [[명나라]] [[홍무제]], [[만력제]], [[숭정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유사한 기능을 했던 [[만동묘]]가 민간에서 세웠다면 대보단은 국가에서 조성한 시설이었다. '황단(皇壇)'으로도 불렸다. == 목적 ==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던 [[명나라]] [[만력제]]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숭정제]]를 기린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당한 [[삼전도의 굴욕]]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신이 절치부심하면서 '명에 대한 충절'을 부르짖던 무렵, 청나라에 불복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지은 단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조선 반청 퍼포먼스의 상징이자 관제 구심점''''이라고 볼 수 있다. == 역사 == [[예조판서]] 민진후의 발의로 1704년([[숙종(조선)|숙종]] 30년) 9월 25일부터 그해 12월 24일까지 약 3달에 걸쳐 지었다. 자리는 옛 별대영(別隊營) 터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3012021_003#footnote_view3|#]] 공사 감독은 당시 선공감 감역으로 있던 김시택이 맡았고, 호조를 비롯한 6조의 당상들이 돌아가면서 공사 지원을 했다. 공사 인력으로 민간인을 동원하기도 했으나 주로 차출한 인원들은 5영 소속 군졸들이었다. 제단의 이름은 그 해 11월 24일 예문관에서 정해 올렸다. 대보단 제사는 조선 후기까지 이루어지다가 1884년([[고종(대한제국)|고종]] 21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중단되었고 1908년([[융희]] 2년)에 정식으로 폐지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07023_003|#]] 사용처가 사라진 대보단은 이후 계속 방치 상태로 있었다가 [[일제강점기]] 때인 1921년에 철거되었고 그 위치에 [[창덕궁 신선원전|신선원전]]이 들어섰다. == 구조 == * 일부 제례 준비 공간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없는 제단으로 [[사직단]]에 준한 규모이다. 교사를 지내던 남교의 규모를 따라 밖에 담을 세우지 않았고 다만, 제단의 담만 쌓았다. * 전체 크기는 정방형으로 한쪽의 길이가 150척(45m)이고, 정방형의 모양의 단의 한쪽의 길이가 25척(7.5m)이며 높이는 5척(1.5m)으로 바닥에서 단까지는 계단 4개를 두었다. == 제사 == 매년 1회 2월 상순에 길일을 정해 지냈다. 2월인 이유는 [[예기]]에 매년 2월마다 중국 황제가 정기적으로 동쪽으로 순행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사망한 명나라 황제의 혼령들이 가장 조선과 가까이 있는 시기가 이때라는 논리. 제사 때는 팔일[* 8×8명, 즉 64명의 무용수들이 나라의 큰 제사 때 추는 규모가 큰 춤을 말한다.팔일무는 황제의 행사나 제사에만 가능했고 왕은 6×6명의 육일무,대부는 사일무, 사는 이일무이다. 현재는 대한제국 시기의 [[종묘제례악]]을 재현한 행사 때에만 팔일무를 볼수있다. ]의 악을 사용하고, 악장은 [[문묘]]의 악장을 사용하게 했다. 위판에는 '대명 신종(大明 神宗)' 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대명(大明)'은 명나라를 뜻하며, '신종(神宗)'은 [[만력제]]의 [[묘호]]이다. 제례는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불참할 경우 중신에게 대신 지내게 했으며, 누런 소를 제물로 썼고 제물과 기구는 문묘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 관련 문서 == * [[만동묘]] [[분류:창덕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분류:조선의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