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농산정'''}}}[br]{{{-1 昌德宮 籠山亭}}}}}}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농산정,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636년]] {{{-1 (창건 추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농산정.jpg|width=100%]]}}} || || {{{#gold ''' 농산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fn10s0YPXo)]}}}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소요정, 취한정, 취규정, 청의정, 태극정과 같이 소개한다. '''}}} || [목차] == 개요 == [[창덕궁#s-5.4.3|창덕궁 후원 옥류천 권역]]에 있는 [[건물]]이다. 이름은 [[정자]]이지만 사방이 트인 일반 정자들과 달리 [[마루]]와 [[온돌|온돌방]]이 있어서 사람이 묵을 수 있었다. 또한 [[부엌]]도 있어서 [[음식]]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를 종합해보면, [[왕]]이 쉬려고 만든 별당 혹은 [[창덕궁 옥류천|옥류천]] 일대에서 가벼운 행사 등을 할 때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용도였던 듯 하다. == 이름 == '농산(籠山)' 뜻은 '[[산]]으로 싸여있다'이다. '농(籠)'은 직역하면 '[[대나무]] [[바구니]]', '[[함]]같은 [[상자]]'를 말하는데 의미를 확장해서 '둘러싸다'는 뜻으로도 쓴다. 산 속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경관을 건물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 역사 == 창건 시기는 모른다. 다만, 1636년([[인조]] 14년)에 지었다는 설이 있다. [[공식]] [[기록]]에 처음 나타난 때는 [[정조(조선)|정조]] 때인 1792년(정조 16년) 3월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가 [[창덕궁 대보단|대보단]]에 참배하기 전에 여기서 여러 번 묵었다는 내용이 나온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3018_001|#]][[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3018_001|#]] 1795년(정조 19년) 2월에는 [[현륭원]] 행차를 대비해 [[혜경궁 홍씨]]의 [[가마]]를 메는 예행 연습을 후원에서 한 뒤 수고한 [[신하]]들에게 여기서 [[음식]]을 대접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902025_001|#]] --여기까지 오느라 더 고생했을 듯 하다--[* 창덕궁 후원에서 옥류천 일대를 가려면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한다.] [[순조]]는 여기서 [[관리]] 및 유생들의 학문을 시험하기도 했다. 입직한 음관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이를 응제(應製)라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1103114_002|#]][[http://sillok.history.go.kr/id/kwa_11108028_002|#]], [[성균관]] 유생의 응강[* 應講. 강경과(講經科)에 응(應)하는 것. 강경과는 과거에서 외운 경서를 암송시킨 후 등락 점수를 매기는 시험이다.]을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1108019_001|#]][[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6%8D%EC%82%B0%EC%A0%95(%E7%B1%A0%E5%B1%B1%E4%BA%AD)|#]]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옛날 농산정1.png|width=100%]]}}} || || {{{#gold ''' 왼쪽은 《동궐도》의 농산정(붉은 원 안), 오른쪽은 《조선고적도보》의 농산정 '''}}} || == 구조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이다. 칸 수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총 5칸이다. [[기단]]은 2단으로, 장대석으로 쌓았다. [[기둥]]과 [[주춧돌]]은 사각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 [[처마]]는 홑처마로, 납도리집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쌓았으며, [[용두]], [[잡상]] 등의 장식물은 올리지 않았다. [[단청]]은 긋기단청[* 가칠단청 위에 선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으로 칠했다. * 건물 앞면과 뒷면(동면과 서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쪽마루를 받치는 [[기둥]]은 [[나무]]이다. * 남쪽부터 2칸이 대청, 2칸이 온돌방, 1칸이 부엌이다. 출입은 [[대청]]의 동쪽 면으로 할 수 있다. 온돌방과 대청 서쪽 면 하단에는 머름을 두었다. * 부엌의 겉면은 동, 서면이 다르다. 동면은 중인방을 두고 그 위에 [[벽]]과 [[창문]]을, 아래에 벽과 붉은 [[나무]][[문]]을 설치한 형태이다. 서면은 동쪽 면과 거의 비슷하나, 그 아래에 [[벽돌]]과 [[암석]]으로 쌓은 방화벽을 설치한 것이 다르다. * 양측면(남면과 북면) 하단에는 방화벽을 설치했다. 상단은 양쪽 면이 다르다. 남면은 [[창문]]이지만, 북면은 [[벽]]이다. * [[온돌|온돌방]] 내부는 칸 구분 없이 트여있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일제강점기]]에 만든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동면에 [[현판]]이 걸려있었다. 현재는 없다. *《[[동궐도]]》에는, 농산정 남쪽에 취병[* 翠屛. 나무로 뼈대를 세운 뒤 뼈대 사이마다 키 작은 나무나 덩굴 식물을 심어 자라게 하는 형태의 담을 말한다.]을 두르고, 취병 가운데에 [[홍예]] 문을 설치한 모습이 나온다. 현재 취병과 문은 모두 사라졌다.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