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24년 출생]][[분류:2015년 사망]][[분류:상하이시 출신 인물]][[분류: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분류:중국공산당 12기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분류:중국공산당 12기 중앙서기처 서기]][[분류:중국공산당 12기 중앙정치국 위원]][[분류:중국공산당 13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분류:중국공산당 13기 중앙서기처 서기]][[분류:중국공산당 14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분류: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분류:중국공산당 조직부장]][[분류: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 [include(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 '''{{{#ffff00 차오스 관련 틀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제5ᆞ6기))]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장)]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장)]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 [include(틀: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4기))] }}} || [[파일:external/static01.hket.com/1aa003313621320_size105_w400_h565_1024.jpg]] {{{+1 乔石·喬石(교석) / Qiáo Shí}}} ([[1924년]] [[12월]] ~ [[2015년]] [[6월]], 향년 90세) [목차] === 개요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3세대 정치인이다. 본명은 장즈퉁(蒋志彤)이며 고향은 [[저장성]]. 즉 [[상하이]] 근방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의 일가이며, 그래서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에서 국제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다. [[장쩌민]]의 유력한 경쟁자였으나 [[1998년]] 장쩌민에게 밀려 정계를 은퇴했다. === 일생 === [[1940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혁명운동을 위해 본명대신 가명인 차오스를 사용하게 된다. 이후 상하이 퉁지대학에서 공부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철공소에서 일했다. [[1963년]]부터 중앙에 발탁되어 외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여 당의 고위직에 진입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장제스]]의 일가인데다가 더욱이 가명인 "차오스 qiaoshi"와 장의 이름이 "제스 jieshi"도 발음이 유사했기 때문에 숨은 장제스 숭배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심한 박해를 받았다. 차오스의 자식들은 그리하여 아버지 성인 장이 아니라 어머니 성인 리(李)를 사용할 정도. 그럼에도 운좋게 [[숙청]]에서 돌아와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1985년]]부터는 정보기관을 맡아 당의 중앙보밀(방첩)위원회(中央保密委员会) 수장이 되었다. 이후 국무원의 부총리가 되었고, 공안부를 맡았다. 그리하여 구시대적 법률집행을 근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당직으로도 계속 승진하여 당정치국의 상무위원이 되고,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총서기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부터 중앙의 요직을 거쳤기 때문에 [[1989년]]까지 [[상하이]]에 있다가 [[천안문 6.4 항쟁]] 이후에야 [[덩샤오핑]]에게 중앙으로 발탁되었고, 대권을 손에 쥔 [[장쩌민]]의 강력한 경쟁자로 평가받았다. 특히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에서 차오스와 중국 개방의 미래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예상보다 훨신 정치력이 뛰어났다. 그는 차오스를 고립시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막았다. 차오스는 장쩌민과 비슷한 상하이 출신이지만 장쩌민의 계파인 [[상하이방]]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3년]]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리에 올라서면서 당시 장쩌민 체제에 또다른 경쟁자로 부상하였는데 나이가 많은지라 [[1998년]] 74세가 되면서 차오스는 덩샤오핑이 마련한 정년에 걸려 은퇴수순을 밟았다(장쩌민보다 두 살이 많다). 서방에서는 차오스가 [[파룬궁]] 탄압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은근히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도 서방의 일방적인 평가라서 실제 본인의 성향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차오스는 상당기간 방첩-공안기관에서 일했고 이런 기관의 성향상, 차오스 본인이 리버럴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좀 무리한 평가이다. 2015년 6월 14일 향년 90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