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베이성의 행정구역)] [[파일:W020210830544235382424.jpg]] 명황릉 중 하나인 현릉 (顯陵) 전경. [목차] == 개요 == {{{+1 钟祥 }}} [[영어]] Zhongxiang [[후베이성]] [[징먼시]]의 현급시. 한수 동안의 평지에 위치하며, 관할 인구는 약 90만명이고 그중 30만이 도시 자체에 거주한다. 중세 시기 영주 (郢州)로 불렸기에 간혹 초나라의 수도 영으로 비정되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며 중세에 영주로 불린 것은 초의 배도 (陪都)였기 때문이다.[* 초나라는 정식 수도든 배도든 모두 영이라 불렀다] 중샹 (종상)이란 지명은 상서로움이 모인다는 뜻으로, [[명나라]] 황제 [[가정제]]의 출신지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황제를 배출한 덕에 16-17세기에는 남경 및 북경과 함께 3대 조정 직할부인 승천부 (承天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조금씩 쇠퇴하고 있다. 곡물, 목화 등의 농작물이 생산되고 중국 제2의 인산염 매장량이 확인되는 등 광물 자원도 풍부하다. 시가지 동북쪽의 명현릉 (明显陵)이 주요 관광지이자 세계유산이고, [[샤오간]] ~ 징먼을 잇는 창징철도가 지나는 중샹역이 있다. == 역사 == [[춘추전국시대]] 독자적인 읍인 교영 (郊郢)이었고, 인근 징저우에 도읍한 초나라의 배도 (부수도)였다. 초나라의 행궁인 난대궁이 있었고, 초문학의 중심지였다. [[전한]] 들어 교영은 영현으로 편성되었고, [[손오]] 시기에 성벽이 둘러져 석성 (石城)이라 불렸다. 본래 형주 강하군에 속했다가 [[서진]] 시기인 299년에 신설된 경릉군으로 이관되었다. [[유송]] 시기인 470년 석성에 설치된 장수현 (萇壽縣)은 곧 경릉군의 치소가 되었고, [[서위]] 시기인 550년에 그를 중심으로 한 영주 (郢州)가 설치되며 장수현 (長壽縣)으로 개칭되었다. [[북주]] 시기 영주는 석성군 (石城郡)으로 개편되었고, [[수나라]] 시기인 607년에 재차 경릉군 (竟陵郡)이 되었다가 [[당나라]] 시기인 621년에 영주로 고정되어 수세기간 이어졌다. === 중근세 === [[파일:3a3410ae0dc44116bfa23e2be14f05c1.jpg]] 가정제의 부친인 [[주우원]]이 안정되어 있는 현릉 전경 [[원나라]] 시기 영주는 안륙부 (安陸府)로 승격되었고, [[명나라]] 시기인 1376년에 안륙부가 안륙주 (安陸州)로 격하되며 장수현은 흡수 및 폐지되었다. 명나라 [[가정제]]가 흥왕으로 재임하던 시절 영주에 머물렀고, 본래 왕위 계승 서열이 낮았지만 운좋게 즉위한 후 예법대로 부친을 안장한 현릉을 조성하였다. 시내에는 원우궁 (元佑宫), 흥왕부 (興王府) 등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1530년, 가정제는 안륙주를 승천부 (承天府)로 승격시켰고 양대 수도권인 순천부 및 응천부와 함께 조정의 직할 3부를 이루게 하였다. 동시에 현이 재설치되며 종상 (鍾祥)으로 명명되었는데, 상서로움이 모인다는 상서종취 (祥瑞鍾聚)에서 유래한 것이다. 1538년에는 배도에 걸맞는 흥도유수사 (興都留守司)가 부임하기 시작했다.[* 서경 유수 할 때의 그 유수 맞다. 조선시대에는 개성, 강화, 광주, 수원에 유수가 부임했다] 1644년 입관에 이어 1645년 남경을 정복한 [[청나라]]는 구체제의 유산인 승천부를 폐하고 안륙부로 환원시켰다. (1646년) === 근현대 === 다만 종상현은 그대로 남았고, [[신해혁명]] 후 부가 폐지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1992년 중샹현은 현급시인 중샹시로 승격되었고, 본래 징저우시에 속하던 중샹은 1996년 인근 징먼시 관할로 이관되었다. [[분류:중국의 도시]][[분류:국가역사문화명성]][[분류:후베이성의 현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