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중국의 역사]][[분류:2세기 멸망]][[분류:후한]] [include(틀:중국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0A420 0%, #F0C420 20%, #F0C420 80%, #F0A420)" {{{#800000 '''중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삼국지)] ---- }}}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0A420 0%, #F0C420 20%, #F0C420 80%, #F0A420)" {{{#800000 {{{+1 '''중'''}}}[br]'''仲 | Zhong Dynasty'''}}}}}} || ||<:><-3> {{{#800000 '''197년 ~ 199년 음력 6월'''}}} || ||<-2> '''{{{#800000 성립 이전}}}''' || '''{{{#800000 멸망 이후}}}''' || ||<-3> '''[[후한|{{{#ece5b6 후한}}}]]''' || ||<:> '''{{{#800000 국호}}}''' ||<-2>중(仲) || ||<:> '''{{{#800000 별칭}}}''' ||<-2>충(沖)[*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서.], [[성나라|성(成)]][* [[삼국지연의]]에서.] || ||<:> '''{{{#800000 위치}}}''' ||<-2>중국 동남부 || ||<:> '''{{{#800000 수도}}}''' ||<-2>[[수춘]] || ||<:> '''{{{#800000 정치 체제}}}''' ||<-2>[[군주제]] || ||<:> '''{{{#800000 국성}}}''' ||<-2>[[원(성씨)#s-8|원]](袁) || ||<:> '''{{{#800000 국가원수}}}''' ||<-2>[[황제]] || ||<:> '''{{{#800000 주요 황제}}}''' ||<-2>[[원술]],,,(197~199),,, || ||<:> '''{{{#800000 언어}}}''' ||<-2>[[상고한어]] || ||<:> '''{{{#800000 문자}}}''' ||<-2>[[한자]] || ||<:> '''{{{#800000 종족}}}''' ||<-2>[[한족]] || ||<:> '''{{{#800000 통화}}}''' ||<-2>[[오수전]] || ||<:> '''{{{#800000 종교}}}''' ||<-2>[[유교]], [[도교]], [[중국 신화|중국 토속 종교]] || ||<:> '''{{{#800000 현재 국가}}}''' ||<-2>[include(틀:국기, 국명=중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며 세운 국가. == 역사 == === 건국 === [[195년]][* 흥평(興平) 2년.] 겨울, [[이각]]·[[곽사]]의 무리에게 핍박받던 [[헌제]]가 장안을 탈출했는데, 당시 [[양주(중국)|양주]] 회남(淮南) 일대를 장악하고 한참 잘 나가고 있던 원술은 이를 보고 한 황실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판단해서 원씨 적통의 위광을 믿고 황제를 참칭할 마음을 먹었으나 주부(注簿) [[염상(삼국지)|염상]]을 비롯한 부하들이 이에 반대하자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197년[* 건안(建安) 2년] 봄, 하내(河內) 사람 [[장형(후한)|장형]]이 부명(符命)[* 하늘이 임금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알리자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던 원술은 오행과 참문에 따라 결국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거성인 수춘이 있는 구강군을 '''회남윤'''(淮南尹)으로 고쳤다.[* '수도'를 관장하는 직책에만 윤([[尹]])을 붙인다. 현대 한국 기준 '특별시'와 같은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윤尹은 특별 행정구역 장관의 관직명인 동시에 행정구역명 그 자체로 쓰였다가 한나라 후에는 관직명으로만 쓰이게 된다. 한나라 기준으로는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 일대를 경조윤,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 일대를 하남윤으로 불렀다. 조선에서 한성을 관장하는 직책도 한성판윤이었다.], 또한 황제가 된 원술은 황제에는 대장군이 꼭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 중 [[교유]]와 [[장훈(삼국지)|장훈]]을 자신의 제국인 중나라의 대장군에 임명했다. 또한 공경(公卿)과 관직을 설치하고, 봄에는 성의 북쪽 교외에서, 겨울에는 성의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후궁 수백 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쌀밥과 고기반찬을 질리도록 먹는 등 사치가 극심하였고, 때문에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멸망 === 같은 해 9월, 원술은 교유 · 장훈과 함께 진(陳)을 점령하고 진왕(陳王) [[유총(진민왕)|유총]]을 죽여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조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고, 옛 부하인 [[진란]]과 [[뇌박]]에게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자기들도 조조한테 죽을까봐 거절당하였다. 이에 종형 [[원소(삼국지)#s-1|원소]]에게 제호를 바치는 서신을 보내어 황제를 칭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원소는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이를 옳게 여겼다. 곧바로 원술은 당질 [[원담]]이 다스리는 [[청주(중국)|청주]]로 향하였으나, [[유비]]에게 저지당하여 가지 못하였다. 수춘에서 80리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러 식량을 확인해 보니, 보리 부스러기만 30곡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날이 몹시 더워 [[꿀물]]을 마시려 하였는데, 꿀 또한 없었다. 원술은 난간에 걸터앉아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 원술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윽고 원술은 수레 바닥에 엎드려, 피를 한 말가량 토하고 죽었다. === 멸망 후의 황실 === 원술이 숨을 거둔 후, 종제 [[원윤]]은 일족들을 이끌고 환성(皖城)을 지키고 있던 원술의 옛 부하인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유훈이 출진하여 성을 비운 사이 [[손책]]이 환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원씨 가문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손책에게 끌려갔다. 원술의 아들 [[원요]]는 훗날 [[오(삼국시대)|오나라]]에서 낭중령(郞中令)을 지냈으며, [[원부인|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이 되었다. == 역대 황제 == [include(틀:역대 중 황제)] || '''대수'''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초대''' || - || [[원술]](袁術) || 불명[* 삼국지연의에서는 중씨(仲氏)라고 나와 있으나 이는 연호가 아니라 국호다. 씨(氏)는 국(國)을 의미하는 동의어이며 [[진시황]]과 같은 의미로 원술이 중나라의 초대 황제임을 나타내는 것.] || 197 ~ 199 || - || == 창작물 == 지금까지 창작물에는 딱히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토탈 워: 삼국]]에서는 [[토탈 워: 삼국/세력/원술|원술 세력]]의 직위가 [[공작(작위)|공]]에 도달하면 중 [[공국]], 왕에 도달하면 중나라로 바뀌게 구현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중, versio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