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존 드 클린턴[br]John de Clinton || ||<-2> '''생몰년도''' ||<(> [[1410년]] ~ [[1464년]] [[9월 24일]] || ||<-2>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클린턴 || ||<-2>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클린턴 || ||<-2> '''아버지''' ||<(> 윌리엄 드 클린턴 || ||<-2> '''어머니''' ||<(> 앨리스 드 보트르 || ||<-2> '''아내''' ||<(> 조앤 페러스, 마가렛 세인트 레저 || ||<-2> '''자녀''' ||<(> 존 드 클린턴 || ||<-2> '''직위''' ||<(> 클린턴 남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대적했으며, [[장미 전쟁]] 시기에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 == 생애 == 1410년경 잉글랜드 왕국 클린턴에서 제4대 클린턴 남작인 윌리엄 드 클린턴과 제2대 보트르 남작 윌리엄 드 보트르의 딸인 앨리스 드 보트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43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주로 워릭셔에 위치한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1439년부터 1441년까지 노르망디 총독 [[요크의 리처드]] 휘하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1441년 퐁투아즈 요새 사령관이었던 그는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지만 끝내 함락되면서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6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1447년 6,000마르크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크의 리처드의 편에 섰고, 1455년 세인트 올번스 전투, 1459년 10월 루들로 전투,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지휘를 받았다. 1460년 요크의 리처드가 전사한 뒤 권력을 장악한 랭커스터파는 의회에서 그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해 오웬 튜더에게 넘겼지만, 1461년 타우턴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의 지휘하에 승리를 거두고 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석한 뒤 작위와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후 초대 켄트 백작 윌리엄 네빌,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와 함께 바다의 수호자 칭호를 받았으며, 10,000명의 군대와 함께 브르타뉴로 항해해 콩케 시를 공략했다. 1463년 에드워드 4세와 함께 랭커스터 잔당을 토벌하고자 잉글랜드 북부로 진군했고, 밤버러 성, 던스턴버러 성, 안위크 성 공방전에 참여했다. 1464년 9월 24일 클린턴 영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채틀리의 제6대 페러스 남작 에드먼드 페러스의 외동딸인 조앤 페러스와 처음 결혼해 제6대 클린턴 남작이 될 존 클린턴을 낳았다.첫번째 부인이 사망한 뒤 기사 존 세인트 레저의 딸인 마가렛 세인트 레저와 재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분류:영국의 귀족]][[분류:영국의 군인]][[분류:1410년 출생]][[분류:1464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