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9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풍양 조씨]][[분류:강릉시 출신 인물]][[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 [목차] == 개요 == 趙平載(1909~1968).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변호사.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경제학자 [[조순]]의 작은아버지이다. == 생애 == 1909년 8월 8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27년 [[배재고등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를 우등졸업[* 당시 함께 우등졸업한 김응윤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나와 피부과 의사로 활동했다.]하고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대학예과|예과]](문과A[* 법문학부 법학과 진학반. 법문학부 문학과/사학과/철학과로 진학예정자는 문과B로 편성되었다.])에 입학하여 1933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법학사). 배재고보 재학 시 경성고등상업학교 어학부 주최 제3회 전조선중등학교 영어변론대회에서 3등에 입상한 바 있으며, 대학 시절부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호걸풍 쾌남으로 평가받았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서기로 근무하다가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8년 3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용되어, 1940년 5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해 1943년 3월까지 근무한 후 사직하고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45년 8월 해방 후 홍순엽[* 193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1936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1961년부터 1976년까지 최장수 [[대법관]]을 지냈다.]과 손잡고 1946년 2월 좌익 법률가 단체인 조선법학자동맹(법맹)을 조직해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동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헌법기초위원,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았다. [[조선정판사 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상무위원장, 국제법률가협회 회장, 한국법학원 이사, 대한중석과 [[삼성물산]] 법률고문 등을 지내다가 1968년 6월 1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일본제국]] 고등관인 판검사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 == 가족 == 장남 조윤성은 재미 사업가이고 차남 조익성은 [[데이콤]] 전무를 지냈다. 사위 박종안은 미국 연방은행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