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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KIA 타이거즈 1차 지명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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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width=7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83년 한국시리즈|{{{#ffffff 1983}}}]]''' || ---- ||<-5>
'''{{{#fff [[해태 타이거즈|'''{{{#ffffff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6번}}}''' || || 결번 || {{{+1 →}}} || '''{{{#ff0000 조종규[br](1983)}}}''' || {{{+1 →}}} || 신태순[br](1985~1987) || ||<-5> '''{{{#ffffff [[OB 베어스|'''{{{#ffffff OB 베어스}}}''']] 등번호 56번}}}''' || || 박종호[br](1984) || {{{+1 →}}} || '''{{{#ffffff 조종규[br](1985)}}}''' || {{{+1 →}}} || 강규성[br](1990) || }}} || }}} || ||<-2>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060910164360006100-001.jpg|width=100%]] || ||<-2> '''{{{+2 조종규}}}'''[br]'''趙鍾奎 | Cho Jong-Gyu''' || ||<|2> '''출생''' ||[[1955년]] [[10월 8일]] ||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이담면[br](현 [[경기도]] [[동두천시]]) || || '''사망''' ||[[2019년]] [[12월 28일]] (향년 64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한영고등학교(서울)|한영고등학교]] {{{-2 (전학)}}} → [[군산상일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업고등학교]] {{{-2 (졸업)}}}[br][[건국대학교 야구부|건국대학교]] {{{-2 ([[학사]])}}} || || '''포지션''' ||[[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1983년/신인드래프트#s-2|1983년 1차 지명]] ([[해태 타이거즈|해태]]) || ||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9~1980) [br] [[해태 타이거즈]] (1983) [br] [[OB 베어스]] (1984~1985) || || '''경력'''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KBO 리그|심판위원]] (1987~2007)[br][[한국야구위원회|KBO]] 상벌위원 (2008) [br][[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 (2008~2013)[br][[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 (2008~2018)[br][[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운영위원 (2014~2016)[br][[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운영위원장 (2017~2018) || ||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육군 경리단]] (1981~1982) || [목차] [clearfix] == 개요 == 前 [[KBO 리그]] 심판위원이자 심판위원장, 경기감독관, 야구선수. == 선수 경력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시절부터 어깨가 좋은 포수로 좋은 평을 받던 선수였고[* 당초 한영고등학교에서 뛰었으나 73년 시즌 후 해체되자 전학],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는 소속한 군산상고가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 등에서 8강, [[청룡기]]에서는 준우승[* 당시 우승팀은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에 오르는데에 큰 활약을 펼쳤다. 이 때문에 청룡기 때에는 [[감투|감투상]]을 받기도 하였고,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그를 '호남 고교야구의 간판스타'라고 칭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 해 [[임호균]], [[장효조]] 등과 함께 대만원정 청소년 야구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112600209208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11-26&officeId=00020&pageNo=8&printNo=16356&publishType=00020|참조]]] 군산상고 졸업 후 [[건국대학교 야구부|건국대]]에 진학하였다. 이때에도 '일발장타의 폭발력'을 지닌 선수로 평가받았다. 1976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백호기]]에서는 [[조흥운]]과 함께 대회 사상 최초의 백투백 홈런을 치기도 했고, 그 해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대통령기]]에서는 7타수 4안타 0.571의 타율로 개인 타격상을 받기도 하는 등 매 경기 홈런타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듬해에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 [[장효조]], [[선우대영]] 등과 함께 미국 원정 대학야구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하였고, 그해 백호기에서 감투상을 받는 등 팀이 준우승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우승팀은 [[한국화장품 야구단]].]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에는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당시 [[최동원]], [[김시진]], [[노상수]], [[임호균]], [[김성한]], [[이만수]], [[김봉연]], [[김진우(1958)|김진우]] 등이 함께 선발되었다.]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건국대 졸업 후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하였고, 이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육군 경리단]]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다. 입대 직후 경리단은 [[한국실업야구]] 후기리그 1위를 하게 되어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 나가게 되었으나, [[롯데 자이언트]]에 밀려 준우승에 그친다. 조종규는 당시 마지막 경기인 6차전에서 역전 2점 홈런을 쳐낸 바 있다. 1982년에는 백호기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1차전에서 대회 첫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71300329208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7-13&officeId=00032&pageNo=8&printNo=11319&publishType=00020|개인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실업야구 등을 거쳐 [[한국프로야구/1983년/신인드래프트|198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포수 최대어로 평가받으면서,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해태에는 원년멤버로 박전섭, 김경훈, 김용만, 홍순만 등 무려 4명의 포수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해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규약에 '해외 교포 선수' 조항이 생기면서[* 해외에 거주하면서 부계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재외 한국인이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뛸 수 있다는 내용], 이에 따라, 드래프트 직후에 해태에서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던 포수 [[김무종]]을 영입하게 되어 경쟁자는 5명으로 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입단 초기부터 치열한 주전 경쟁에 투신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결국 당시 해태 [[김응룡]] 감독은 상위 리그인 일본프로야구를 경험해본 김무종을 중용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원래 있던 4명의 포수들과 함께 조종규 또한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실제로 82년 당시 해태 주전 포수는 박전섭(45경기 106타수 23안타 7타점 7득점 0.217)과 김용만(56경기 102타수 15안타 7타점 7득점 0.147)이 번갈아 포수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김경훈(29경기 35타수 3안타 1타점 3득점 0.086)과 홍순만(11경기 13타수 1안타 2득점 0.077)이 간간이 1군에 출장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무종이 입단한 1983년 이후 박전섭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1군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박전섭도 85년까지 23경기 출전하는데 그치며 1987년 [[빙그레 이글스]]로 팀을 옮겼으나 결국 1988년 이후 은퇴한다. 홍순만은 1982년 시즌 후 방출된 뒤 1985년에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고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군에 단 3경기만 출장하며 은퇴한다. 참고로 김무종은 1983년 93경기에 출장하여 309타수 81안타 12홈런 60타점 43득점 0.262의 성적을 보여주었는데, 위 4명과 기록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김무종이 자신의 실력으로 무려 4명의 밥그릇을 뺏은 셈. 여담으로 원년멤버 박전섭은 조종규의 군산상고 후배인데 둘 다 다른 학교 야구부 해체 후 전학을 왔다(박전섭-광주 숭의실고(75년 시즌 후) 조종규-한영고(73년 시즌 후)). 설상가상으로 김무종은 그해 12홈런에 0.262의 타율을 보여주며 타격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등 명실공히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길 김응용 감독이 '조종규 저 xx가 안타를 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고 그말을 --얄밉게도-- 김성한이 군산상고 선배인 조종규에게 전하자 불같은 성격의 조종규가 김응용에 따지러 갔고 김응용은 배트가방을 찾더니 배트를 꺼내 때리려고 해서 조종규가 도망갔다고 한다.] 결국 조종규는 입단 첫 해 17경기 27타수 1안타 0.037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1984년 [[OB 베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당시 조종규는 없었으나 김일권이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항명사건을 술회하면서 조종규도 해태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잘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OB에는 이미 해마다 주전 경쟁을 벌이는 [[김경문]]과 [[조범현]]이라는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고, 이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한다. 그 해 성적은 29경기 출장하여 21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0.095이 전부.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였고 1985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 심판위원 경력 == 1987년 2월에 [[KBO 리그]] 심판위원이 되었다. 2008년 2월부터 심판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심판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오심이 많이 나와 논란을 빚었으나, 정작 경질되지는 않았다. 2014년 심판위원장을 그만둔 직후 경기감독관으로 임명되어 2018년까지 KBO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하였다. == 사망 == 2019년 12월 28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날 [[윤석환]]의 직구 직설(2019.12.27 방송)에 [[https://youtu.be/QgXa_jokIKQ|출연하기도 하였다.]] == 연도별 성적 == ||<-16>
{{{#ffffff 역대 기록}}} || || {{{#ffff00 연도}}} || {{{#ffff00 소속팀}}} || {{{#ffff00 출장 경기수}}} || {{{#ffff00 타수}}} || {{{#ffff00 타율}}} || {{{#ffff00 안타}}} || {{{#ffff00 2루타}}} || {{{#ffff00 3루타}}} || {{{#ffff00 홈런}}} || {{{#ffff00 타점}}} || {{{#ffff00 득점}}} || {{{#ffff00 도루}}} || {{{#ffff00 4사구}}} || {{{#ffff00 출루율}}} || {{{#ffff00 장타율}}} || {{{#ffff00 OPS}}} || || 1982 ||<|2> [[해태 타이거즈|해태]] ||<-14> 1군 기록 없음 || || 1983 || 17 || 27 || .037 || 1 || 0 || 0 || 0 || 0 || 0 || 0 || 1 || .071 || .037 || .109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출장 경기수}}} || {{{#ffffff 타수}}} || {{{#ffffff 타율}}} || {{{#ffffff 안타}}} || {{{#ffffff 2루타}}} || {{{#ffffff 3루타}}} || {{{#ffffff 홈런}}} || {{{#ffffff 타점}}} || {{{#ffffff 득점}}} || {{{#ffffff 도루}}} || {{{#ffffff 4사구}}} || {{{#ffffff 출루율}}} || {{{#ffffff 장타율}}} || {{{#ffffff OPS}}} || || 1984 ||<|2> [[OB 베어스|OB]] || 29 || 21 || .095 || 2 || 0 || 0 || 1 || 1 || 2 || 1 || 6 || .296 || .238 || .534 || || 1985 ||<-14> 1군 기록 없음 || ||<-2> '''[[KBO 리그|KBO]] 통산''' [br] (2시즌) || 46 || 48 || .063 || 3 || 0 || 0 || 1 || 1 || 2 || 1 || 7 || .182 || .125 || .307 || == 2018년 6월 6일 (수요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구장]] 사건 관련[*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269182|관련 기사]]] == 2018년 6월 6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구장]]에서 발생한 경기감독관 구장 내 사건에서 유일하게 알리바이가 없는 감독관(2018년 6월 11일 기준). 이 시점 5명의 감독관은 [[한대화]], [[김시진]], [[김용희]], [[임채섭]], 조종규 등 5명인데 각자 알리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6월 7일부터 성희롱 감독관의 직무가 정지되었으므로''' 이후라도 감독관으로 활동하면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한대화]]는 6월 6일 마산 경기 감독관, [[김시진]]은 주말시리즈 대구 경기 감독관, [[김용희]]는 6월 6일 고척 경기 감독관, [[임채섭]]은 주말시리즈 사직 경기 감독관이었기에 빼도박도 못 하는 확정이다.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분류:동두천시 출신 인물]][[분류:1955년 출생]][[분류:1979년 데뷔]][[분류:1985년 은퇴]][[분류:2019년 사망]][[분류:포수]][[분류:우투우타]][[분류:해태-KIA 타이거즈/은퇴, 이적]][[분류:OB-두산 베어스/은퇴, 이적]][[분류:KBO 리그 심판]][[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분류:군산상업고등학교 출신]][[분류:건국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