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병천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ff9933 [[청보 핀토스|'''{{{#ff9933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ff9933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24번}}}''' || || 박명운[br](1983~1985) || {{{+1 →}}} || '''{{{#ffffff 조병천[br](1986~1992)}}}''' || {{{+1 →}}} || [[구윤]][br](1993.6.30.~1994) || }}} || ||<-2> '''{{{+2 조병천}}}[br]曺秉千 | Cho Byung-Cheon''' || || '''출생''' ||[[1960년]] [[5월 25일]] ([age(1960-05-25)]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전주제일고등학교|전주상고]]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1986년/신인드래프트#s-3|1986년 2차 13라운드]] ([[청보 핀토스|청보]]) || ||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0~1985) [br]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6~1992)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소속 투수. 학창시절부터 프로야구 선수시절까지, 약팀에서 고생고생하며 활약한 투수. 프로야구 선수 중 어릴 때 천재 아니던 선수 없다지만 조병천은 그 시절부터 기사 등 인지도가 낮은 편에 속하며 프로에서도 무명의 설움을 많이 겪었다. 부족한 성적을 감안하더라도 승운이 심각하게 없던 선수.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시절 === [[전주상고]] 출신이다. 나무위키의 전주상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아예 야구부의 언급 자체가 없다. 구글에 검색해봐도 한 때 전주 야구를 대표하던 야구부가 사라져서 슬프다는 지역 신문의 기사 하나 뿐이다. 이는 그가 3학년이던 1979년을 끝으로 야구부가 폐부됐기 때문. 그 79년에는 네이버 옛날신문 기준으로 그 흔한 기사 하나도 없다. 졸업 후 한국화장품에 입단했지만 별다른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85년 시즌이 끝난 후 [[청보 핀토스]] 2차 지명으로 프로에 진출한다. 당시 프로야구의 1차 지명은 10명까지 지명이 가능하기에 사실상 2차까지 내려가는 일도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지명돼도 포기하고 진학하거나 실업야구를 향하기 마련이었다. 조병천은 그런 2차 지명으로 프로야구를 시작한다. === 프로 경력 === 86년, 87년 청보에서는 계투로 주로 뛰었다. 당시 아무리 마구잡이로 등판했다지만 잘하는 선수는 선발로 많이 나오는 것이 조병천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86년엔 조병천을 청보 핀토스의 강력한 타선 구성원이라며 기사를 올린 신문도 있었다. 86년엔 딱 1승을 올렸는데 이 1승은 당시 7연패의 늪에 빠져있던 청보가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3:8로 지고있던 8회, 아무런 기대없이 조병천을 올렸다가 [[양승관]]의 역전 쓰리런 홈런으로 얻게 된 것. 감독이었던 [[허구연]]은 기뻐서 눈물을 흘렀으며 기사도 조병천을 행운의 투수라 언급하기 여념이 없었다. 87년엔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8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그때 기사 제목은 '무명 투수 돌풍' 이때 조병천의 소감은 '강타자일 수록 약점도 많다'. ~~천하무적 타선 청보 핀토스~~ 이 해 조병천은 4승 중 3승을 완투승으로 따내는 한편 9월 26일에는 8.1이닝을 1실점으로 막고도 승리는 [[배경환]]에게 뺏기는 등[* 9회 1사 만루 상황에서 강판] 승운이 안 좋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9월 16일에는 '조(병천)는 담력이 약해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에 나온적이 없었다'라며 디스도 먹었다. 당연히 그 경기에선 패배 적립. 팀 이름이 청보 핀토스에서 [[태평양 돌핀스]]로 바뀌며 조병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88년이 찾아온다. 이 해 조병천의 성적은 나름 훌륭했으나 그리 특출나지는 않았다. 3.94로 가까스로 4점을 면한 방어율, 128이닝으로 겨우 규정이닝을 넘긴 수준의 이닝, 2승 10패의 기록. 그러나 투수의 기록에서 승수가 모든 걸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8월 중, 22경기를 출장했을 때 그의 성적은 0승 9패 1세이브. 다 이긴 경기를 수비가 말아먹어 무승부가 된 게 2번이고 끝내기 패배가 된 것이 2번이었다. 6번을 1점차로 패배했고 5번은 타격불발로 무승부.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무승의 에이스였다. 23번째 경기에서야 겨우 승리를 딸 수 있었다. 한 시즌에 1:0 경기를 가장 많이 경험한 투수가 바로 88년 조병천인데, 그는 4월~8월 사이에 5번이나 1:0을 경험하며 2승 3패를 기록했다. 그가 경험한 2승조차도 모두 1:0의 살얼음판 승부였던 것. 89년엔 다시 주춤하다 90년엔 나름 성적을 올리며 [[기나쌩|해나쌩]]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들은 이유가 고작 2승 덕분.~~88년 얘기보면 2승이라도 충분히 들을만 한 것 같다~~ 그 후 노쇠화로 인해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92년엔 4.2이닝 완투패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92년 시즌이 끝난 후 [[이선웅]], [[김재박]], [[이광근]] 등과 함께 은퇴한다. 97년엔 이영만이라는 기자가 잡초의 향이 더 진하다는 기사를 쓰며 기약없는 인생을 살던 조병천(현대)이 7년만에 잠에서 깼다 표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불문. 아마 [[조웅천]]이랑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 트리비아 == [[마구마구]]에서는 조우천이란 가명으로 등장한다. KBO 분류도 우완이고 89년엔 오른손잡이라는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42900329211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4-29&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413&publishType=00020|기사]]도 있으나 게임 내에는 좌투우타로 나온다(…) ~~여기서도 무명의 설움이~~ 쓰는 플레이어도 적지만 좌투가 적은 80년대이기에 쉬쉬하는 편. 청보에 쓸만한 좌완이라곤 [[양상문]], [[정성만]] 밖에 없다. ~~컬트적인 인기까지 따지면 [[감사용]]까지~~ 각종 야구게임에서는 청보의 존속기간이 2년 반밖에 안 되기에 계투로 곧잘 언급되는 편. 정작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89년에는 성적도 성적이고 이닝도 적어서 로스터 채우는 용도로 사용된다.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각주] [[분류:1960년 출생]][[분류:1992년 은퇴]][[분류:우투우타]][[분류: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