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창녕 조씨]][[분류:화순군 출신 인물]][[분류:1910년 출생]][[분류:2008년 사망]] ||||<:>[[파일:조병의.jpg|width=300px]] || || 성명 ||<(> 조병의(曺秉義) || || 본관 ||<(> [[창녕 조씨]][* 23세손 '''병(秉)''' 병(柄) 상(相) 항렬.] || || 생몰 ||<(> [[1910년]] [[10월 1일]] ~ [[2008년]] [[1월 14일]][*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80116/8534052/1|#]]] || || [[출생지]] ||<(> [[전라남도]] 능주군 신풍면 대비동[br](현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대비리)[*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조병의는 1910년 10월 1일 전라남도 능주군 신풍면 대비동(현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대비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광역시|광주군]]으로 이주하여 광주군 광주면 누문리(현 [[광주광역시]] [[북구(광주)|북구]] [[누문동]])에 거주하였다.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광주농업학교]]에 재학중이던 1928년 6월, 그는 교내 항일학생결사인 광주농업학교 독서회에 가입하여 민족의식을 길렀으며, 민족차별을 자행하는 악질 일본인 교사의 추방운동을 전개하며 동맹휴학을 주동하기도 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농업학교의 2학년 책임자로서 학생운동을 주도, 학생들을 동원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하여 1930년 초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또한 독서회 활동과 관련하여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다가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로 석방되었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09&evntId=0034991755&evntdowngbn=Y&indpnId=000002278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출옥 후 그는 고향 화순군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1935년 3월 고향에 야학을 설치하여 농촌 청소년의 문맹퇴치 및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후 2008년 1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