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국회)] ||<-5> {{{#ffffff {{{+1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5> {{{#!wiki style="margin: -7px -12px;" || {{{-2 [[1967년]] [[6월 8일]]}}}[br][[제7대 국회의원 선거|7대 총선]] || → || {{{-2 [[1971년]] [[5월 25일]]}}}[br]'''8대 총선''' || → || {{{-2 [[1973년]] [[2월 27일]]}}}[br][[제9대 국회의원 선거|9대 총선]] ||}}} || || {{{#70000b,#fe8f9a '''투표율'''}}} ||<-4>73.2%{{{-3 [[제7대 국회의원 선거|{{{#blue,#0000ff ▼ 2.9%p}}}]]}}} || ||<-5> {{{#ffffff '''선거 결과'''}}} || ||<-5> [[파일:8대 총선 결과.png|width=100%]]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35B38 calc(113*100%/204), #DC352A 0%, #DC352A calc((113 + 89)*100%/204), #FE5E56 0%, #F1433A calc((113 + 89 + 1)*100%/204), #08508A 0%, #08508A calc((113 + 89 + 1 + 1)*100%/204));" }}} || || '''정당''' || '''지역구''' || {{{#!wiki style="margin: 0 -10px;" '''전국구'''}}} || '''총합''' || '''비율''' || || [[민주공화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35B38; font-size: .9em;" {{{#ffffff '''민주공화당'''}}}}}}]] || '''86석''' || '''27석''' || '''113석''' || '''55.39%''' || || [[신민당(1967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C352A; font-size: .9em;" {{{#ffffff '''신민당'''}}}}}}]] || '''65석''' || '''24석''' || '''89석''' || '''43.62%''' || || [[국민당(1971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1433A; font-size: .9em;" {{{#ffffff '''국민당'''}}}}}}]] || 1석 || 0석 || 1석 || 0.49% || || [[민중당(1967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8508A; font-size: .9em;" {{{#ffffff '''민중당'''}}}}}}]] || 1석 || 0석 || 1석 || 0.49% || [목차] [clearfix] == 개요 == '''[[1971년]] [[5월 25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73.2%를 기록했다.''' 153석의 지역구'''([[소선거구제]])'''와 51석의 '''[[전국구]]'''를 선출했다. '''[[무소속]]의 출마가 여전히 금지'''되었고, 선거법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총선부터 기호를 추첨제로 정하지 않고 원내 다수당 순서대로 상위 순번의 기호를 부여받도록 했다. == 결과 == [[파일:Screenshot 2020-07-29 at 22.55.32.png]] ||<-7> {{{#ffffff '''정당 득표율''' }}} ||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인 || || [include(틀:민주공화당)] || 5,460,581 || {{{#835B38,#5757ff '''48.8%'''}}} || 27 || || [include(틀:신민당(1967년))] || 4,969,050 || {{{#dc352a,#55ffd0 '''44.4%'''}}} || 24 || || [include(틀:국민당(1971년))] || 454,257 || 4.1% || [*A 지역구 3석을 획득하지 못해 전국구에서는 획득하지 못했다.] ||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155,277 || 1.4% || [*A 지역구 3석을 획득하지 못해 전국구에서는 획득하지 못했다.] || || [include(틀:통일사회당)] || 97,398 || 0.9% |||| || [include(틀:대중당)] || 59,359 || 0.5% |||| || 총합 || 11,195,922 || 100.0% || 51 || ||<-3> '''{{{#abf200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 || '''제1당''' || [include(틀:민주공화당)] || '''113석''' || || '''제2당''' || [include(틀:신민당(1967년))] || '''89석''' || || 제3당 || [include(틀:국민당(1971년))] || 1석[*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한다.[[http://www.fnnews.com/news/201606141126327058|기사]] ] || || 제4당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1석 || ||<-6>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 지역 || [[민주공화당|{{{#fff 민주공화당}}}]] || [[신민당(1967년)|{{{#fff 신민당}}}]] || [[국민당(1971년)|{{{#fff 국민당}}}]] || [[민중당(1967년)|{{{#fff 민중당}}}]] || 합계 || || 서울 || 1 || {{{#fff 18 }}} || 0 || 0 || 19 || || 경기 || {{{#fff 11 }}} || 4 || 0 || 1 || 16 || || 강원 || {{{#fff 8 }}} || 1 || 0 || 0 || 9 || || 충남 || {{{#fff 11 }}} || 4 || 0 || 0 || 15 || || 충북 || {{{#fff 6 }}} || 2 || 0 || 0 || 8 || || 전남 || {{{#fff 15 }}} || 7 || 0 || 0 || 22 || || 전북 || {{{#fff 6 }}} || {{{#fff 6 }}} || 0 || 0 || 12 || || 부산 || 2 || {{{#fff 6 }}} || 0 || 0 || 8 || || 경남 || {{{#fff 9 }}} || {{{#fff 9 }}} || 0 || 0 || 18 || || 경북 || {{{#fff 15 }}} || 8 || 1 || 0 || 24 || || 제주 || {{{#fff 2 }}} || 0 || 0 || 0 || 2 || || 지역구 || {{{#fff 86 }}} || 65 || 1 || 1 || 153 || || 전국구 || {{{#fff 27 (48.8%) }}} || 24 (44.4%) || 0 (4.1%) || 0 (1.4%) || 51 (100%) || || 합계 || {{{#fff 113 }}} || 89 || 1 || 1 || 204 (100%) ||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약 한 달 후 치러진 선거다. 국민들은 [[박정희]]를 재신임하기는 했지만 결과는 박빙이었고, 부정선거 논란도 컸음을 감안하면 국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특히 [[3선 개헌]]의 여파로 악화된 여론은 여전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난 총선보다는 확실히 야권의 의석수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신민당은 선거를 앞두고 [[진산 파동]]을 겪었으나, 일단 그 여파를 조기에 수습하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체계적인 공작은 계속되었고, [[공무원]]들을 [[야당]] 유리 선거구로 전입시키는 등의 관권선거도 여전했으므로, 선거 직전까지도 신민당은 개헌저지선 확보도 힘들지 않을까라는 전망이 우세한 편이었다. 하지만 막상 개표를 시작하니 반전이 일어났다. 공화당에서는 28명의 현역 의원이 대거 낙선한 반면, 신민당은 7대 국회 대비 두 배 가까운 의석을 확보하면서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기며 제대로 된 양당 체제가 생겨나게 된다. [[여촌야도]]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신민당은 전통적 민주당계 정당 강세 지역인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과 대구, 인천, 광주에서도 선전했다. [[민주공화당]]은 과반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개헌선에 한참 미달했고 득표율도 48.7% vs 44.3%로 4.4%pt의 격차에 그치면서 온갖 선거 공작을 벌였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완패했다.[* 같은 민주당계 정당인 국민당, 민중당과 원내 진입에 실패한 대중당과 통일사회당까지 합치면 득표율에서 '''범야권이 민주공화당을 앞섰다.'''] '''특히 서울에서는 딱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패배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유일한 서울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1934)|장덕진]]인데, '''신민당 대표'''였던 [[유진산]]이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 장덕진에게 [[진산 파동|지역구를 거저 내준 일]]만 아니었다면 신민당의 서울 전 지역구 석권도 가능했을 것이다. 7대 대선과 8대 총선에서 연이어 여당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자 박정희는 통상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의 연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한 번만 더 나를 뽑아 주면 더 이상 국민에게 표 달라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월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1년 반 만에 국회를 해산시키고야 만다.''' 그렇게 등장한 [[유신헌법]]에서는 이 선거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즉 입법부를 완전 장악하기 위해 국회 의석수의 1/3을 차지하도록 강제한 [[유신정우회]]를 신설한 것은 덤이다. === 선거구별 결과 === [[제8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분류:제8대 국회의원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