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 ||<-4> {{{+1 {{{#FFF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3.ruliweb.com/15a0dfc03fa3459e3.jpg|width=100%]][br]{{{-2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 ||<-4><#005BA6> {{{#!wiki style="margin: -7px -12px" ||<#FFF,#222> {{{-2 [[1987년]] [[12월 16일]]}}}[br][[제13대 대통령 선거|13대 대선]] || → ||<#FFF,#222> {{{-2 [[1992년]] [[12월 18일]]}}}[br]'''14대 대선''' || → ||<#FFF,#222> {{{-2 [[1997년]] [[12월 18일]]}}}[br][[제15대 대통령 선거|15대 대선]] ||}}} || ||<#f5f5f5,#2d2f34> {{{#005ba6,#59b3ff '''투표율'''}}} ||<-3>81.89% {{{-3 [[제13대 대통령 선거|{{{#blue,#3162C7 ▼ 7.26%p}}}]]}}} || ||<-4><#005BA6> {{{#FFFFFF '''선거 결과'''}}} || ||<#f5f5f5,#2d2f34> {{{#005ba6,#59b3ff '''후보'''}}} || [[민주자유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3990; font-size: .8em" {{{#FFFFFF '''민주자유당'''}}}}}}]][br]'''[[김영삼|{{{#003990 김영삼}}}]]''' || [[민주당(1991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82634; font-size: .8em" {{{#FFFFFF '''민주당'''}}}}}}]][br]'''[[김대중|{{{#D82634 김대중}}}]]''' || [[통일국민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2B14C; font-size: .8em" {{{#FFFFFF '''통일국민당'''}}}}}}]][br]'''[[정주영|{{{#22B14C 정주영}}}]]''' || ||<|2><#f5f5f5,#2d2f34> {{{#005ba6,#59b3ff '''득표율'''}}}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990 45.6%, #d82634 45.6%, #d82634 81.3%, #22B14C 81.3%, #22B14C)" }}} || || '''41.96%''' || 33.82% || 16.31% || ||<#f5f5f5,#2d2f34> {{{#005ba6,#59b3ff '''득표수'''}}} || '''9,977,332''' || 8,041,284 || 3,880,067 || ||<-4><#005BA6> {{{#FFFFFF '''대통령 당선인'''}}}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김영삼|[[파일:Kim_Young-sam_presidential_portrait.jpg|width=100%]]]]}}} || ||<-4> [[민주자유당|{{{#FFFFFF '''민주자유당'''}}}]][br]'''[[김영삼|{{{#FFFFFF {{{+2 김영삼}}}}}}]]'''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영삼-당선-인사.jpg|width=100%]]}}} || || '''기뻐하는 [[김영삼|{{{#FFFFFF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 내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2김영삼당선_조선일보.png|width=100%]]}}} || ||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zuwCwEHDyA)]}}} || || '''대한민국 제14대 [[김영삼|{{{#ffffff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영상''' || >'''[[新]][[한국]] 창조!''' >---- >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슬로건]]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2년]] [[11월 20일]]에 [[관보]]에 공고. (대통령공고 제129호)[* [[파일:제14대 대통령 선거 공고.jpg]] ][* 참고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 체제에서 [[관보]]에 공고된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 뻔 했는데, 그 이유는 이후에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대통령 선거'''의 시행이 법정화가 되어 굳이 공고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의해 파면]] 당하고, 이후에 시행한 [[제19대 대통령 선거|궐위로 인한 선거]]의 날짜를 공고하기 위해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같은 해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25년 만에 공고하였다(대통령공고 제271호)],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되었으며 기호 1번 [[김영삼]] 후보가 기호 2번 [[김대중]] 후보를 득표율 8.14%p, 표차 193만 6,048표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 배경 == [[1987년]] 개헌 이후 두 번째로 시행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이자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이후 실시된 최초의 선거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쳐 비대해진 [[민주자유당|거대 여당]]을 이끄는 [[김영삼]]과 [[민주당(1991년)|통합 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경쟁하였다. 특이한 점은 1960년대부터 줄곧 보여왔던 [[여당]]의 [[군인]]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출신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라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자유당|거대 여당]]과 [[민주당(1991년)|제1야당]]과의 대결이었다. 한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재력을 바탕으로 [[통일국민당]]을 결성, 대통령 선거에 앞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획득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 마지막으로 [[민주당(1990년)|꼬마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 [[박찬종]] 역시 [[신정치개혁당]] 깃발 아래 출마하게 된다. == 과정 == === 후보자 경선 === ||<#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youtube(EnxE2V1EulA)]}}} || || {{{#ffffff '''후보자 경선'''}}} || ==== [[민주자유당]] ==== [include(틀:민주자유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민주당(1991년)|민주당]] ==== [include(틀:민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통일국민당]] ==== [include(틀:통일국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본선 == [include(틀: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 || [[파일:attachment/14thelectionmascot.png|width=100%]] || || 각 정당의 마스코트. 왼쪽부터 [[신정치개혁당|신정당]]의 종돌이, [[통일국민당]]의 호돌이,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토끼와 거북이, [[민주자유당]]의 곰돌이. || 당초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의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김영삼의 입지에 큰 타격이 온 상태였으나, 민주자유당내에서 [[김영삼]]을 위협하는 대권 주자가 없어서 역으로 [[노태우]]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을 압박하여 당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데에 성공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각 후보의 지역을 기반으로 4개로 나눠진 모양인데 반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대체로 [[경상도|영남]]과 [[전라도|호남]]의 대결 구도였다. 김영삼 후보의 지지기반은 [[3당 합당]]으로 인해 전통적 지지기반이었던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부울경|PK]])에서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와 [[경상북도]]([[대경권|TK]])까지 연고범위가 넓어졌다. --우리가 남이가-- 김대중 후보는 지지기반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편 정주영은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특별자치도|강원도]]와 더불어 [[충청도]]에서 지지를 보탰다.[* 하지만, 정주영 후보가 강원특별자치도와 충청권에서 상대적으로 강세였다는 뜻이지, 강원특별자치도와 충청권의 1위는 김영삼이었다. 선거 당시에는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에서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 전이라 충청도 지역 정당은 없었다. 다만 통일국민당은 훗날 신정치개혁당과 합쳐져 [[신민당(1994년)|신민당]]이 되었다가 이후 자유민주연합으로 흡수되었다.] [[http://www.youtube.com/embed/TVGceZuIEV4|'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세운 김영삼 후보 진영의 광고.]] [[http://blog.naver.com/creative_21/10182864107|'상도동의 새벽' 광고]] --깨알 같은 [[이덕화|전두환]]-- --빈손으로 돌아와.-- [[https://youtu.be/_rib5rxQbJE|'금요일엔 바꿉시다'를 기치로 내세운 김대중 후보 진영의 광고]] [[https://youtu.be/fVtchD2t0Ho|'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을 기치로 내세운 정주영 후보 진영의 광고]] --이 사람 밑에 있던 [[이명박|아주 유명한 현대그룹 임원]]도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는데.--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 맞선 [[민주당(1991년)|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여당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은 [[제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백64일 야당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년간의 군정 기간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30년 전인 [[1992년]] 대통령 선거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20500209204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2-05&officeId=00020&pageNo=4&printNo=22020&publishType=00020|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 후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20500329105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12-05&officeId=00032&pageNo=5&printNo=14605&publishType=00010|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 강조]] 예전 선거에 비해 선거 기간 중 [[북한]]의 도발 등의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이 때 지금도 [[지역감정]]의 악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초원복집 사건]]이 있다. 해당항목 참조. 또한 민주자유당 측에서는 끊임없이 김대중 후보에게 용공론을 펼쳤고, 민주당 측에서는 김영삼 후보의 [[3당 합당]]을 비난하는 등 네거티브 선거 양상이 짙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의외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초접전을 벌이고 정주영과 박찬종이 3위~4위를 다투던 구도였지만 부동층이 위낙에 많아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으로 영남권의 표가 김영삼으로 쏠리면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8.14% 차이로 여유있게 제치고 당선되었다. ---- || [[파일:KakaoTalk_20170503_204709624.png|width=100%]] || ---- '''다음날 오전 8시 5분, 개표 92.7% 상황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한편, [[남장여자|남장]] 정치인으로 유명해진 [[김옥선]]도 '''무공약이 공약'''을 내세우며 출마했다. 지키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게 낫다는 취지. 사실 정치적 경력으로 볼 때 "황당한 후보, 황당한 대선 공약"이라고 까고 보긴 어렵지만 결국 입에 오르내려지는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결국 김옥선 후보는 86,292표, 득표율 0.36%에 그쳐 6위로 낙선했다.[* 그래도 [[제19대 대통령 선거]] [[조원진]](42,949표)보다는 2배 가까운 득표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연고지이자 과거 지역구였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조차 처참히 발렸다(...). 이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3위 낙선했던 상태. == 예측 조사 == ||<-7> '''{{{#FFFFFF 한국갤럽 1992년 대통령 선거 예측 조사}}}''' ||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6|출처]] ||<#003990> '''[[김영삼|{{{#FFF 김영삼}}}]]''' ||<#d82634> '''[[김대중|{{{#FFF 김대중}}}]]''' ||<#22B14C> '''[[정주영|{{{#FFFFFF 정주영}}}]]''' ||<#317873> '''[[박찬종|{{{#FFF 박찬종}}}]]''' ||<#808080> '''{{{#FFFFFF 기타 후보}}}''' || ||||전체 ||<#003990> '''39.5%''' || 31.1% || 15.7% || 12.4% || 1.2% || ||||실제 결과 || '''+2.5%p''' ||<#D82634> '''+2.7%p''' || '''+0.6%p''' || '''-6.0%p''' || - || ||<|4>세대별 ||20대 || 22.2% ||<#D82634> '''37.3%''' || 20.7% || 16.8% || 3.0% || ||30대 ||<#003990> '''31.5%''' || 26.4% || 22.4% || 18.8% || 0.9% || ||40대 ||<#003990> '''49.0%''' || 30.0% || 10.5% || 9.7% || 0.7% || ||50대 이상 ||<#003990> '''55.9%''' || 30.9% || 8.5% || 4.4% || 0.3% || ||<|2>성별 ||남성 ||<#003990> '''34.2%''' || 32.1% || 17.8% || 14.4% || 1.5% || ||여성 ||<#003990> '''44.5%''' || 30.2% || 13.8% || 10.5% || 1.0% || ||<|8>권역별||서울 || 31.3% ||<#D82634> '''32.4%''' || 19.0% || 16.1% || 1.3% || ||인천/경기 ||<#003990> '''35.6%''' || 28.2% || 19.9% || 14.8% || 1.5% || ||강원 ||<#003990> '''38.8%''' || 22.4% || 24.3% || 14.5% || 0.0% || ||대전/충청 ||<#003990> '''39.5%''' || 26.3% || 21.5% || 11.7% || 1.0% || ||광주/전라 || 3.2% ||<#D82634> '''88.1%''' || 1.7% || 5.7% || 1.3% || ||대구/경북 ||<#003990> '''66.4%''' || 5.0% || 17.7% || 9.4% || 1.4% || ||부산/경남 ||<#003990> '''64.1%''' || 12.3% || 10.2% || 12.4% || 1.0% || ||제주 ||<#003990> '''41.7%''' || 28.9% || 16.7% || 10.6% || 2.2% || ||<|3>지역크기별 ||대도시 ||<#003990> '''40.2%''' || 26.7% || 16.7% || 15.1% || 1.3% || ||중소도시 || 32.5% ||<#D82634> '''33.8%''' || 18.5% || 13.9% || 1.4% || ||읍/면 ||<#003990> '''45.7%''' || 36.5% || 10.9% || 5.9% || 1.0% || ||<|4>학력별 ||초졸 이하||<#003990> '''56.8%''' || 31.8% || 6.6% || 4.5% || 0.3% || ||중졸||<#003990> '''47.8%''' || 31.7% || 11.7% || 8.3% || 0.5% || ||고졸|| 30.8% ||<#D82634> '''31.5%''' || 21.0% || 15.6% || 1.2% || ||대재 이상|| 26.7% ||<#D82634> '''29.0%''' || 20.8% || 20.2% || 3.3% || ||<|7>직업별 ||농/임/어업 ||<#003990> '''44.0%''' || 42.5% || 7.2% || 5.9% || 0.3% || ||자영업 ||<#003990> '''37.6%''' || 27.5% || 19.6% || 14.8% || 0.5% || ||블루칼라 ||<#003990> '''33.5%''' || 31.8% || 18.7% || 15.2% || 0.8% || ||화이트칼라 || 27.6% ||<#D82634> '''30.2%''' || 24.1% || 16.4% || 1.7% || ||가정주부 ||<#003990> '''47.8%''' || 26.6% || 14.2% || 10.3% || 1.1% || ||학생 || 11.0% ||<#D82634> '''37.2%''' || 14.7% || 29.8% || 7.3% || ||무직/기타 ||<#003990> '''41.9%''' || 30.3% || 14.2% || 11.4% || 2.2% || ||<|4>87년대선투표별 ||노태우 ||<#003990> '''55.4%''' || 17.5% || 17.5% || 8.9% || 0.7% || ||김영삼 ||<#003990> '''52.0%''' || 16.0% || 14.5% || 16.1% || 1.3% || ||김대중 || 10.3% ||<#D82634> '''68.2%''' || 10.1% || 10.4% || 0.9% || ||김종필 ||<#003990> '''38.1%''' || 16.4% || 30.2% || 13.4% || 1.9% || ---- 1992년 당시에는 전체 선거 기간(28일) 동안에는 여론조사 공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992년 11월 17일 여론조사를 끝으로 변화 양상을 알 수가 없었다. 갤럽에 따르면 이후 기간 동안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격차가 점점 좁혀졌고, 1992년 12월 15일 조사에서는 0.5%의 차이를 보였으나, 이날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5일 조사 당시까지 30%를 넘었던 의견유보층의 표심을 예측해야했기 때문에 갤럽은 그날 면접 조사를 기반으로한 판별 분석을 통해 [[MBC]]에 예상 득표율을 전달했고, 실제 득표율을 맞추는데 거의 성공했다. 다만 [[박찬종]] 후보는 예측치보다 실제 득표율이 6%p나 떨어졌는데, 당시 갤럽리포트에 따르면 사표방지 심리의 작용과 당시 부산기관장회의 파동으로 인해 [[영남]]지역의 표심이 김영삼 지지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 투표율 == ||<-4> '''{{{#ffffff 성별 투표율}}}''' || || '''남성''' || '''82.6%''' || '''여성''' || 80.9% || ||<-4> '''{{{#ffffff 종합 연령별}}}''' || || 20대 전반 || 69.8% || 20대 후반 || 73.3% || || 30대 전반 || 82.1% || 30대 후반 || 85.9% || || 40대 || 88.8% || 50대 || '''89.8%''' || || 60대 이상 || 83.2% || == 개표 결과 == ||<-4> [[대한민국 대통령|{{{#ffffff {{{+1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5 '''1'''}}} || '''[[김영삼|{{{#373a3c,#dddddd 김영삼}}}]](金泳三)''' || '''9,977,332 ''' || '''1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41.96%''' || '''당선''' || ||<|2> {{{+5 '''2'''}}} || [[김대중|{{{#373a3c,#dddddd 김대중}}}]](金大中) || 8,041,284 || 2위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33.82% || 낙선 || ||<|2> {{{+5 '''3'''}}} || [[정주영|{{{#373a3c,#dddddd 정주영}}}]](鄭周永) || 3,880,067 || 3위 || || [include(틀:통일국민당)] || 16.31% || 낙선 || ||<|2> {{{+5 '''--4--'''}}} || --[[이종찬(1936)|{{{#373a3c,#dddddd 이종찬}}}]](李鍾贊)-- ||<|2><-2> 사퇴 || || --[include(틀:새한국당)]-- || ||<|2> {{{+5 '''5'''}}} || [[박찬종|{{{#373a3c,#dddddd 박찬종}}}]](朴燦鍾) || 1,516,047 || 4위 || || [include(틀:신정치개혁당)] || 6.37% || 낙선 || ||<|2> {{{+5 '''6'''}}} || [[이병호(변호사)|{{{#373a3c,#dddddd 이병호}}}]](李炳浩) || 35,739 || 7위 || || [include(틀:대한정의당)] || 0.15% || 낙선 || ||<|2> {{{+5 '''7'''}}} || [[김옥선|{{{#373a3c,#dddddd 김옥선}}}]](金玉仙) || 86,292 || 6위 || || [include(틀:무소속)] || 0.36% || 낙선 || ||<|2> {{{+5 '''8'''}}} || [[백기완|{{{#373a3c,#dddddd 백기완}}}]](白基琓) || 238,648 || 5위 || || [include(틀:무소속)] || 0.99% || 낙선 || ||<|3> {{{#black '''계'''}}} || '''선거인 수''' || 29,422,658 ||<|3> '''투표율'''[br]81.89% || || '''투표 수''' || 24,095,170 || || '''무효표 수''' || 319,761 || === 지역별 개표 결과 === ||<-5> {{{#ffffff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해당 지도에는 오류가 존재한다. [[충청북도]] [[진천군]]과 [[충청남도]] [[논산시]](당시 논산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또한 [[충청남도]] [[서산시]]는 [[정주영]] 후보가 승리했다.]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14대_대선_1555778182260.jpg|width=100%]]}}} || || '''정당''' || [include(틀:민주자유당)]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include(틀:통일국민당)] || [include(틀:신정치개혁당)] || || '''후보''' || [[김영삼|{{{#ffffff '''김영삼'''}}}]] || [[김대중|{{{#ffffff '''김대중'''}}}]] || [[정주영|{{{#ffffff '''정주영'''}}}]] || [[박찬종|{{{#ffffff '''박찬종'''}}}]] || || '''전국''' ||<#003990> '''9,977,332[br](41.96%)''' || 8,041,284[br](33.82%) || 3,880,067[br](16.31%) || 1,516,047[br](6.37%) || || '''서울''' || 2,167,298[br](36.41%) ||<#D82634> '''2,246,636[br](37.74%)''' || 1,070,629[br](17.98%) || 381,535[br](6.41%) || || '''부산''' ||<#003990> '''1,551,473[br](73.34%)''' || 265,055[br](12.52%) || 133,907[br](6.33%) || 139,004[br](6.57%) || || '''대구''' ||<#003990> '''690,245[br](59.59%)''' || 90,641[br](7.82%) || 224,642[br](19.39%) || '''136,037[br](11.74%)''' || || '''인천''' ||<#003990> '''397,361[br](37.26%)''' || 338,538[br](31.74%) || 228,505[br](21.42%) || 84,211[br](7.89%) || || '''광주''' || 14,504[br](2.13%) ||<#D82634> '''652,337[br](95.84%)''' || 8,085[br](1.18%) || 2,827[br](0.41%) || || '''대전''' ||<#003990> '''202,137[br](35.19%)''' || 165,067[br](28.73%) || 133,646[br](23.26%) || 64,526[br](11.23%) || || '''경기''' ||<#003990> '''1,254,025[br](36.33%)''' || 1,103,498[br](31.97%) || 798,356[br](23.13%) || 239,140[br](6.92%) || || '''강원''' ||<#003990> '''340,528[br](41.51%)''' || 127,265[br](15.51%) || '''279,610[br](34.08%)''' || 56,199[br](6.85%) || || '''충북''' ||<#003990> '''281,678[br](38.26%)''' || 191,743[br](26.04%) || 175,767[br](23.87%) || 68,900[br](9.35%) || || '''충남''' ||<#003990> '''351,789[br](36.93%)''' || 271,921[br](28.54%) || 240,400[br](25.24%) || 64,117[br](6.73%) || || '''전북''' || 63,175[br](5.67%) ||<#D82634> '''991,483[br](89.13%)''' || 35,923[br](3.22%) || 9,320[br](0.83%) || || '''전남''' || 53,360[br](4.20%) ||<#D82634> '''1,170,398[br](92.15%)''' || 26,686[br](2.10%) || 7,210[br](0.56%) || || '''경북''' ||<#003990> '''991,424[br](64.72%)''' || 147,440[br](9.62%) || 240,646[br](15.71%) || 124,858[br](8.15%) || || '''경남''' ||<#003990> '''1,514,043[br](72.31%)''' || 193,373[br](9.23%) || 241,135[br](11.51%) || 115,086[br](5.49%) || || '''제주''' ||<#003990> '''104,292[br](39.97%)''' || 85,889[br](32.92%) || 42,130[br](16.14%) || 23,077[br](8.84%) || ---- [[파일: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투표 결과.png]] ---- 대부분의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는 [[전라도|호남]]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1.33% 차이로 신승했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했는데 양김의 우세 지역은 5년 전 대통령 선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 결과로 나왔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근소한 표차로 김대중이 이긴 것은 맞지만, 서울특별시의 각 자치구별로는 표심이 매우 엇갈렸다. [[중산층]] 이상이 많이 거주하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와 [[용산구]] 등에서는 김영삼이 넉넉한 표차로 앞섰고[* 용산구를 제외한 4곳은 5년 전에도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는데, 3당 합당으로 보수층은 표심이 대거 몰리면서 일부 동들은 3자구도에서 50%를 넘겼다. 만약 정주영의 독자 출마가 없었다면 70% 득표율도 가능했을 수준.], 호남 출신 노동자와 서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등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과 변두리 권역들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 때 당시는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양천구]], [[노원구]]가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제3지대 보수 정당 후보인 [[정주영]] 후보와 [[박찬종]] 후보의 표를 김영삼과 합치면 서울특별시에서도 보수 진영이 민주당계 진영을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부산광역시]]·[[경상남도]]([[PK]])의 김영삼 득표율이 [[대구광역시]]·[[경상북도]]([[TK]])의 보수 정당 득표율보다 높았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의 이러한 줄어든 득표율은 김대중이 아닌 정주영과 박찬종 쪽으로 분산되었다.][* 김영삼 후보는 그의 고향인 거제군 장목면 제4투표소에서 전체 283표중 283표를 득표하여 '''득표율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YS의 지역 기반이 [[부산광역시]]·[[경상남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경상남도의 인구가 대구광역시·경상북도의 인구보다 많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가 193만표라는 꽤 큰 표차로 승리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도 다른 선거만은 못했을 뿐이지[* 더블 스코어로 이기기는 했지만 과반도 못 얻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홍준표]]는 제외. 이 때는 김영삼의 경우와는 달리 보수 정당 자체가 궤멸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어찌되었든 김영삼이 큰 격차로 승리했다. 이러한 영호남의 인구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승리해야 했지만,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에서만 신승하는데 그쳤고 영호남의 표를 제외한 수도권+충청권+강원특별자치도+제주특별자치도 합산에서도 패배했다.[* 이때의 패배를 바탕으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을 결성, 충청도의 표심을 확보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는 20년 뒤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지역별 결과와 비슷하다. 광역자치단체 표심 뿐만 아니라 시, 군, 구 등 기초자치단체들의 표심 또한 상당히 유사하다. 두 선거 모두 [[대한민국 보수정당|보수 정당]] 대 [[민주당계 정당]]의 양강 구도를 띤 것이 두 선거의 지역별 결과가 유사하게 나온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주영 후보가 16%라는 상당한 득표율을 올리긴 했지만 어느 한 쪽의 진영에 속한다기보다는 성공신화를 가진 기업인 출신으로서 기존 정치를 불신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받은 것에 가까웠다. 이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안철수]]랑 비슷하다.][* 다만 정주영과 안철수를 비교해보면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는데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은 제3지대이지만 엄연히 보수정당에 가까웠고 통일국민당의 구성원도 대부분 보수 정당 출신이 많았고 보수정당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나중에는 보수 지지 성향을 띄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나중에 제1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으로 복당했고 잔류파 역시 충청계 보수정당인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당시 [[안철수]]의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은 당시에 제3지대이면서도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운 느낌이 났고 당시 국민의당의 구성원은 민주당계 정당 출신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나중에 다시 [[더불어민주당]]으로 가거나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운 제3지대 정당인 [[민주평화당]]을 차려서 독립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에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제법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정주영 후보는 [[충청권]]에서 득표율이 꽤 되었는데 나중에 통일국민당의 잔여 기반을 나름 흡수한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 충청권을 석권하고 [[TK]]에서 선전했지만, 이와 반대로 안철수는 호남에서 꽤 득표를 했지만 이후 안철수는 [[전라도|호남]]에서 지지율을 확 잃었고, 게다가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의 구성원들은 나중에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둘러싸고 사분오열이 되었으며 일부는 [[민주평화당]]으로 가게 된다. 연이어서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은 7회 지방선거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연이어서 [[바른정당]]과 합당해서 생긴 [[바른미래당]]의 구성원들도 손학규계, 당권파, 안철수계로 나뉘어서 사분오열이 되었고 손학규계,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을 합당해서 생긴 [[민생당]]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멸했는데 이 역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차이가 꽤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즉, 양측 진영에서 여러 후보가 나와 지지층이 분열되고, 이로 인해 지역별 1위 후보가 뒤바뀌는 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격전 지역 === 각 지방을 대표하는 맹주 간 대결답게 지역구도가 확고했지만 이런 지역주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수도권 지역과 충청도 지방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또 정주영 후보의 연고지였던 강원특별자치도에서는 김영삼, 정주영 후보의 접전지가 많았다. 시, 군, 구 단위에서 1위, 2위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각주가 없는 곳들은 양김의 접전 지역이다. * 경기도 이천군: '''2표''' 차 김영삼 승[*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43표''' 차 김영삼 승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107표''' 차 김영삼 승 * 강원도 춘천군[* 현재 춘천시의 읍면지역.]: '''126표''' 차 김영삼 승[*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 인천직할시 북구 갑[*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부개동, 일신동, 십정동.]: '''132표''' 차 김대중 승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갑: '''222표''' 차 김대중 승 * 경기도 시흥시: '''302표''' 차 김영삼 승 *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 '''311표''' 차 김영삼 승 * 강원도 양양군: '''424표''' 차 김영삼 승[*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원.]: '''447표''' 차 김대중 승 * 경기도 군포시: '''517표''' 차 김대중 승 * 강원도 원주시: '''542표''' 차 김영삼 승[*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 서울특별시 중랑구 을: '''755표''' 차 김영삼 승 * 경기도 의왕시: '''757표''' 차 김영삼 승 * 충청북도 진천군: '''886표''' 차 김대중 승 * 제주도 서귀포시: '''913표''' 차 김대중 승 *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965표''' 차 김대중 승 * 충청남도 서산군: '''987표''' 차 정주영 승[* 2위는 김영삼 후보였으며 3위 김대중 후보 또한 1위와 '''4%''' 남짓 차이였던 접전지역이었다.] * 강원도 평창군: '''991표''' 차 김영삼 승[*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이상 19곳이 이번 대선 격전지였으며, 그 중 [[양김]] 사이의 접전지 13곳 중 7곳에서 김영삼 후보가 6곳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며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지역주의]] 구도에서 인구가 더 많은 [[영남]]에서 몰표를 받은 김영삼 후보가 인구가 적은 [[전라도|호남]]에서 몰표를 받은 김대중 후보를 앞서게 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몰론 상술했듯 영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의 총합도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다만 두 후보의 정치적 연고지가 정반대였으면, 인구가 더 많은 영남을 차지한 후보가 수도권+충청권+강원특별자치도+제주특별자치도의 표 차이를 모두 상쇄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 여담 == *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이 선거의 개표 방송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뜻밖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바람. * [[부울경|부산·경남]]의 보수 정당 후보 득표율이 [[대구·경북]]의 보수 정당 득표율보다 높은 유일한 대통령 선거이기도 한데, 이는 YS의 지역 기반이 [[부울경|부산경남]]이었기 때문이다. YS는 당시 부산경남에서 약 73%의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후로도 이 지역에서 이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는 없다. 반면 대구·경북에서 YS의 득표율은 약 50~60% 정도에 그쳤고, 이는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보수 정당 후보의 [[TK]] 득표율 중 두 번째로 낮은 수치이다. 이는 민정계 - 민주계 의원과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YS가 민자당을 장악해가면서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反 YS 정서가 커져 정주영과 박찬종이 약 10~20% 가량 잠식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양당의 이념이 보다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PK와 TK의 정치성향 또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대선에서의 득표율 분포는 적어도 한동안은 유일한 사례로 남을 듯 하다.[* 참고로 민주당계의 텃밭인 호남의 경우 대체로 광주전남이 전북보다 민주당 지지가 더 강하긴 하나, 전북의 주류 민주당계 득표율이 전남보다 더 나오는 경우도 생각보다는 자주 나온다. 대선의 경우 이러한 사례가 8번 중 2번 있었다. ([[17대 대선]], [[19대 대선]])] * 2017년 1차 경찰공무원 채용시험의 한국사 과목에서 이 대선이 나왔다. 정확히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한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순서를 맞추는 문제인데 '제14대 대통령 선거'라고 나와서 이게 몇년도 대선인지 모르면 맞출 수 없는 문제였다. * [[북한]]은 대선이 끝나자 북한 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통해 ‘예상대로의 남조선 대통령선거’라는 논평에서 처음으로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 언급했다. 해외통신에 따르면 로동신문 논평은 미국의 지배와 간섭이 지속되고 있는 남조선에서는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6공 [[민자당]] 정권의 연장이라는 구태의연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런 전제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변혁을 요구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염원과는 배치되는 결과라고 비난했다. [[로동신문]] 논평은 또 [[민자당]]과 현 집권 당국이 거국 중립내각 등 인민 대중의 요구를 억눌러서 진정한 인사가 선거에 반영될 수 없었고 새 정권이 문민정권도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 같은 [[북한]]의 태도를 [[제13대 대통령 선거|5년전]] 당시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 직후와 비교해 보면 비난의 기조는 변함이 없었다.[* 1992년 대선 결과에 대한 북한의 노동신문 논평.[[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750964_30556.html|북한, 대통령선거 결과 비난]]] * 최초의 컬러사진 벽보이다. 1980년대 후반에 컬러가 대중화되었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선거벽보는 흑백이었다. [[분류:제14대 대통령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