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原 (140? ~ 189)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후한]] 말의 [[군벌]]로 [[자(이름)|자]]는 건양(建陽). 연의에서는 형주자사로 되어 있지만, 정사에서의 직위는 병주자사였다. == [[삼국지(정사)|정사]] == 사람됨이 거칠고 치밀하지 않았지만 무용을 갖추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병주]]의 소리 출신으로 남현(南縣)의 현리(縣吏)가 되어 명을 받으면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급박한 일이 생겨 [[도적]]들을 추격할 때는 늘 선두에 섰다. 일찍이 [[여포]], [[장료]] 등을 천거했고 북방 일대의 [[약탈|노략질]]하는 [[마적]]들을 토벌해 무공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하진(삼국지)|하진]]이 환관에게 암살되기 전에 소집을 받은 [[군벌]] 중 한 명으로 하진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무맹도위로 지냈고 하진의 지시로 흑산적으로 변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맹진에서 인가와 관청을 불태워 낙양 안을 비추게 했다. 이때에 휘하에 가사마(假司馬)를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집금오[* 집금오는 왕궁 숙위의 우두머리이니 하남윤과 집금오는 낙양일대의 병마절도사급이다.]가 되었고, [[동탁]]에게 부추겨진[*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때 동탁이 여포를 꼬드기기 위해 자신의 명마인 적토마를 보내주었다고 나오는데 정사에서는 적토마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정원군 소속의 여포를 동탁군으로 빼내는 역할은 이숙이 담당하였다.] 여포에게 [[참수]]당하고 군세도 빼앗겼다. == [[삼국지연의|연의]] == 소설가 [[나관중]]의 착오로 [[형주]]자사였다고 언급된다.[* 병주와 형주를 헷갈리는 건 한참 후에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기 직전에 [[이승(조위)|이승]]이 형주자사로 부임한다고 말하는 것을 병주자사가 되었다는 것으로 잘못 들은 것처럼 꾸며 노망 연기를 할 때 다시 언급된다. 병주(Bīngzhōu)와 형주(Jīngzhōu)가 중국인 입장에서 대충 들으면 어지간히 헷갈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병주와 형주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병주는 후한 최북단에 해당되는 반면 형주는 후한 최남단인 교주의 북쪽에 맞닿아 있다.[* 다만 형주는 후한의 수도 낙양의 바로 남쪽이기도 하다. 그냥 형주가 오지게 컸던 것이다. 실제로 형주는 [[후한 13주]]중 가장 큰 익주 다음인 두번째로 넓은 주다.] [[후소제(후한)|소제]]를 폐위하려는 동탁에게 대항해 승리하였으나 동탁에 의해 부추겨진 여포에게 죽고, 군세를 빼앗기고 만다. 여포의 상관에서 여포의 양아버지로 각색했다. 정사에서 여포가 양아버지로 섬긴 건 동탁 뿐인데 여포의 의리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원도 양아버지로 설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정원(삼국지)/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후한의 군벌]][[분류:140년 출생]][[분류:189년 사망]][[분류:참수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