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우채}}}[br]鄭瑀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우채.jpg|width=100%]]}}} || || '''성명''' ||정우채(鄭瑀采) || || '''호''' ||금하(錦下) || ||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 ||<|2> '''출생''' ||[[1911년]] [[11월 6일]] || ||[[전라남도]] [[나주시|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 ||<|2> '''사망''' ||[[1989년]] [[9월 23일]] ||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 '''가족''' ||아버지 [[정순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생애 == 정우채는 1911년 11월 6일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에서 아버지 [[정순규]]와 전의 이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나주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경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을 하다가 1년간 휴학을 당했다. 그 후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때 [[장재성]]ㆍ[[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연구, 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성진회를 결성하여 비밀결사의 주역으로서 활동했다. 훗날 성진회는 항일학생독립운동의 모체가 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633|성진회(醒進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우채는 문예운동에 참여하여 다음과 같은 '단결하자'라는 시제(詩題)로 조선일보 학생문단에 당선되었다. 그 후 성진회 활동 중 쓴 시로 '우리는' 등이 있다. >단결하자 > >나는 보았노라. >약한 개미의 단결력을 >단결력이 무엇보다 큰 것을 > >오 자본가의 XX한 >그 XX에 XX 당하는 약한 동포 >굶주리고 헐벗는 동포여 > >약한 개미의 단결력을 보라. >한 힘으로 못하면 >두 힘으로 세 힘으로 > >오 자유에 굶주린 동포여 >우리의 힘은 강할 것이다. >모이는 진리를 안다면 강할 것이다. > >XXX XXX 합하고 합의하여 >XXX 큰 바닷물이 되지 않던가 > >우리도 적은 힘 합하고 합의하여 >힘껏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도 큰 바다에 XX의 바다에 >가게 되리라. >우리는 > >우리는 >자유의 벌판으로 벌판으로... >힘차게 달리는 >기차의 운전수가 되자!!! 1928년 6월 정우채는 광주고보생 [[이경채]]에 대한 학교측의 퇴학처분에 항의하며 복교운동을 주도했다. 동교생 [[김기권]], 임주홍, [[최규창]] 등 2, 3, 4학년생들과 합의하여 학교측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동맹휴학투쟁을 지도한 것이다. 그는 이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 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정우채는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경찰서(현 충장로 2가 옛 무등백화점 부근)에 수감되었다. 1930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았다. >'반남면 신촌리에 사는 정우채(19세)를 지난 6일 당지 주재소에서 검거하여 광주경찰서로 호송한 일이 있다는데(중략), 사건내용은 광주학생사건에 관계가 있다하여 그와 같이 검거한 것이다.'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서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정우채는 일제 경제수탈로부터 경제자립과 재건을 위해 유치오와 함께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어린이잡지「아히생활」의 동인으로 활약하고 '자미사(紫微社)' 라는 써클을 조직하여 계몽잡지를 발간하다가 나주 일경에 체포되어 반년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호남신문 논설위원, 세계통신사 전남지사장 등을 역임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사 편찬위원, 광주학생독립운동지회 이사를 지냈다. 1989년 9월 2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10년 11월 9일 정우채의 장남 대륜상운(주) 대표 정찬준이 한국독립동지회장으로 위임되었다.[* [[http://www.k1919.org/|한국독립동지회]]] [[분류:1911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나주시 출신 인물]][[분류:하동 정씨]][[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광주학생항일운동]][[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