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선의 학자, rd1=정여창(1450))] [include(틀:청사고)] ||<-2> '''{{{+1 정여창}}}[br]丁汝昌 | Dīng Rǔchāng'''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Dīng Rǔchāng.png|width=100%]]}}} || ||<|2> '''출생''' ||[[1836년]] [[11월 18일]]|| ||[[청나라]] [[안후이성]] 루장현[br](現 [[중국]] 화둥 지방 [[안후이성]] 루장현) || ||<|2> '''사망''' ||[[1895년]] [[2월 12일]] || ||[[청나라]] [[산둥성]] [[웨이하이시]][br](現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 [목차] [clearfix] == 개요 == [[청나라]]의 군인. == 생애 == 안후이성 루장현에서 태어났다. 집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3년 정도 사숙을 했을 뿐 별다른 교육은 받지 못했다. 10살 무렵에는 학문의 기회마저 잃었다. 1854년에 태평천국군이 여강을 점령하자 정여창도 태평천국군에 합류했다. 1864년, 태평천국이 멸망하면서 이번에는 유명전을 따라 북상하여 염군과 싸웠다. 북양통상대신 겸 직례총독이었던 이홍장이 서양식 해군을 창설한다는 말을 듣고 정여창은 이홍장에게 의탁했다. 이홍장은 정여창과 유명전이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을 고려하여 정여창을 상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새로운 해군을 창설하는 데 참여시켰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 함장 오장경의 명령으로 정여창은 북양 함대의 군함 5척을 이끌고 이끌고 조선에 가서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오장경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해서 돌아왔다. 이에 따라 조선에 친청 정권이 복귀했고, 기존의 종주국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군함 12척을 거느리고 [[황해 해전]]을 벌였으나, 군함 5척을 잃고 웨이하이시로 퇴각하였다. 황해 해전에서의 전략을 정여창 본인이 진두지휘 하여 만들었는데, 육군 출신답게 정원함과 진원함 같은 강력한 기함을 센터에 두어버리는 옛날 중세시대에도 안 통할 범선 전략을 써 버리는 바람에 또다른 패배 요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 해전은 [[항공모함]]같이 배 자체의 전투력이 부족한 경우가 아니면 기함이 함대의 전투력 최상위급 전투함이므로 최선두에 선다. 해군 지식이 있었던 [[등세창]]이 전략을 짰으면 피해가 어느정도는 최소화 됐을것 이다. 다음해 2월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부하와 주민의 생명을 구하려고 항복했고, 이홍장에게 패했다는 전보를 전한 뒤 아편을 극대량으로 섞어서 만든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정여창이 자살하자 부관들과 영국 고문단은 일본측에 항복했으며, 일본측은 포로는 모두 석방하고, 청군의 나머지 군함들은 자기네 함대에 편입시켰다. 일본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 제독은 정여창의 시신을 노획한 청나라측 배 한척에 실어 보내주었으며, 이 배가 떠날 때 일본 해군 전 장병에게 경례로 전송하게 했다. 사후 한참 뒤인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여 정여창의 시신이 들어있던 관이 도굴 되었고, 정여창의 유골이 다 홍위병 들에게 태워버려 지고 나서 그의 관짝도 분해되어 훗날 인민공사 식당의 의자가 되는 굴욕이 되기도 하였다. == 기타 == * 청나라 조정에서 군축을 결정하자 정여창은 유명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부대를 축소한 일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분노한 유명전은 정여창을 암살 하려 했지만, 암살 계획을 우연히 들은 정여창은 빨리 보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화를 면했다. *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백송이 연기했다. [[분류:허페이시 출신 인물]][[분류:1836년 출생]][[분류:1895년 사망]][[분류:청나라의 군인]][[분류:약물로 죽은 인물]][[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전쟁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