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정두현.jpg]] ^^[[https://brunch.co.kr/@librarytraveler/65|출처]]^^ [목차] == 개요 == 정두현(鄭斗鉉, 1888 ~ ?)은 [[일제강점기]] 조선과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한 교수, 의사, 정치인이다. [[제국대학]]을 3군데 나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도쿄제국대학의 경우 학사는 아니다.] == 생애, 활동 == [[1888년]] [[10월 27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평양의 유지였던 정재명(鄭在命, 1861~1947)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삼남)은 [[친족상속법]]의 비조라 불리는 [[정광현]]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다.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1914년 [[도쿄농공대학|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를 졸업[* 1914년 당시의 명칭이다. 1919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로 개칭된다. '실과'는 본과인 농학부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급의 과정으로 1935년에 도쿄고등농림학교로 분리된 후 1949년 [[도쿄농공대학]]이 되었다. [[우장춘]]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 출신이다. 실과는 학사 학위로 인정되지 않고 도쿄제국대학 동문으로도 등재되지 않았다. 단, 우장춘은 이후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하고 동 대학 농학부 동물학연구실에서 2년간 연구생 생활을 하다가 평양으로 돌아와 [[광성고등학교(서울)|광성고등보통학교]] 교사와 숭덕학교 교감을 지냈다. 1919년 숭덕학교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여 평양형무소에서 4개월간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이후 '평양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청년 운동을 펼쳤으며 숭인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7년 40세의 나이로 생물계의 현상과 이치에 대해 공부하고자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 생물학과에 들어가 1930년 졸업했다. 동 대학원 이학부에서 연구생으로 1년 더 공부한 뒤 돌아와 [[숭실대학교|숭실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1938년 [[신사참배]]에 따른 종교적 신념 문제로 숭실전문학교가 자진 폐교하자, 51세의 나이로 [[대북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942년 졸업해 [[8.15 광복]] 직전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학 및 생리학교실 연구실에서 연구생으로 근무했다. 1945년 10월 [[평양의학전문학교]]장으로 초빙되었고,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이 설립되면서 초대 의학부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북조선 임시헌법제정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1949년 12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외과학대회 준비위원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행적이다. [[분류:1888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도호쿠대학 출신]][[분류:국립타이완대학 출신]][[분류:연일 정씨]][[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의학·약학 교수]][[분류:이학 교수]][[분류:김일성종합대학 재직]][[분류: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