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흥수}}}'''[br]'''田興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전흥수.jpg|width=100%]]}}} || || '''호''' ||거암(巨巖) || ||<|2> '''출생''' ||[[1938년]] [[11월 8일]] || ||[[충청남도]] [[예산군]] || || '''사망''' ||[[2023년]] [[10월 22일]] (향년 85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직업''' ||무형문화재 || || '''학력''' ||[[동국대학교]] {{{-2 (사회복지학 / 학사)}}} || || '''가족''' ||배우자 박희준, 슬하 1남 전욱진, 3녀 전민승·전진기·전진선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인간문화재. == 생애 == 그는 1938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인 전병석과 충청 지방의 유명한 대목장[* 대목장은 집 짓는 일 즉, 건축 공사의 전반을 담당하는 목수를 뜻한다. 이들은 각 재료를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 설계부터 공사 감리까지 다양한 과정을 맡는다. 궁궐이나 사찰, 군영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都邊首)를 지칭하기도 한다.]이었던 김중희 아래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체계적으로 고건축 기술을 익혔다. 그는 1961년부터 주요 문화유산 공사 현장에서 일하면서 남한산성, 흥인지문, 창덕궁 등을 수리·보수했고, 마곡사·월정사·화엄사 등 주요 사찰 공사도 맡았다. 이후 1979년 문화재수리기능자(국가유산수리기능자) 자격을 취득해 장인으로서 한 길을 걸었다. 자격을 취득 후 문화유산 보수에 매진한 그는 수원 화성의 남쪽 문인 보물 ‘수원 팔달문’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는 공사를 총괄하는 도편수로서 약 3년간의 작업을 이끌기도 했다. 2000년 무형문화재(국가무형유산) 대목장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대목장 보유자가 된 후로는 후학양성을 위해 대목 기능을 가르쳤고 전통 건축의 보존과 전승에 심혈을 기울였다. == 사망 == [[2023년]] [[10월 22일]] 사망했다. [[분류: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분류:1938년 출생]][[분류:2023년 사망]][[분류:예산군 출신 인물]][[분류:동국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