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적경원(積慶園)은 [[고려]]의 원([[園]])[* 왕의 사친(四親)의 무덤을 가리킨다.]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사친(四親)의 [[신주]]를 안치하기 위해 설치했다. == 역사 == 공양왕이 즉위하고 두 달 뒤인 1390년 1월 9일, 예조[* 공양왕이 즉위한 해에 예의사(禮儀司)에서 바뀐 명칭.]에서 왕의 4대조를 추봉하고, 그 신주를 모실 원(園)을 두며, 제사를 관장하는 관청인 사관(祠官)을 둘 것을 청했다. 예조는 황실의 먼 친척으로 제위를 계승한 [[후한]]의 [[광무제]]와 [[북송]]의 [[영종(북송)|영종]]을 언급하고, [[사마광]]과 [[여불위]][* 보다 정확하게는 [[여씨춘추]]에서 [[정자]](程子)의 논설을 인용한 것이다.]의 논설을 인용하며 왕의 사친을 추증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공양왕이 예조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공양왕의 부친, 조부와 조모, 증조부와 증조모, 고조부와 고조모 일곱 명이 국공과 국비로 추증됐다. 공양왕의 모친 [[국대비 왕씨]]는 아직 살아있었고 추증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외에 제사를 맡을 관청인 적경서(積慶署)가 설치됐으며 제사를 올릴 날짜도 삭망(朔望, 음력 초하루와 보름)과 사맹월(四孟月, 사계절의 첫 달)로 정해졌다. 윤4월,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적경원에서 행할 일곱 신위의 부묘안신제(祔廟安神祭, 신주를 사당에 옮긴 뒤 지내는 제사)와 사계절에 올리는 제향의 기물·예의 등을 제릉서(諸陵署)에 의거해 행하게 됐다. 6월 3일, [[성균관]] 옆에 적경원이 완공됐다. 왕은 25일에 적경원에 행차했고 27일 사친의 추봉과 봉안 의식을 행했다. 사친 일곱 명에 맞게 일곱 명의 왕실 종친이 제사를 지내며 신위를 맞아 봉안했다. 삼한국대공 [[왕균(고려)|왕균]]은 길에서 죽어 조역(兆域, 묫자리)이 없었기에 귀빈을 맞는 영빈관(迎賓館)에서 장전(帳殿, 임시로 꾸며진 왕의 자리)을 설치해 신위를 맞았고, 공양왕의 동생 정양부원군 [[왕우(고려)|왕우]]가 각 사(司)의 관원 한 명과 함께 공복(公服)을 입고 시위했다. 제물로는 소와 양이 한마리씩, 돼지 일곱마리가 쓰였고, 의장 등은 경령전(景靈殿)과 같이 행했다. 적경원 밖에는 비석[* 『고려사』에 [[정도전]]이 적경원중흥비(積慶園中興碑)의 비문을 쓰고 옷 한벌과 말 한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이 세워졌고 공양왕은 동생 왕우에게 제사 전반을 맡겼다. 이후에도 공양왕은 적경원을 찾았다. 1391년 11월에는 공양왕이 직접 적경원에 행차해 제사를 지냈고, 1392년 4월에는 세자 [[왕석]]이 적경원을 참배했다. 그러나 [[조선|새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12월 26일에 인희전(仁熙殿)과 함께 헐렸다. [[분류:고려/건축]][[분류:무덤]]